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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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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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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갈 곳이 없어지니 발길이 마포대교로 향했다. 마포대교 위에서 꼼짝 않고 두어 시간 동안 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목적지도 모른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어 다다른 곳이 ‘영등포 광야 홈리스센터’였다. 사탕 상자의 밑바닥처럼 귀퉁이가 깨지고 동강이 난 사탕들, 이리저리 구르다 부서져 모래알처럼 조각난 사탕들이 눅눅한 설탕 가루와 함께 바닥에 엉겨 붙어 있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들, 무기력한 눈빛으로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과만 남은 사람들 속에서 뒤엉켜 1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자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굳게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노숙인이 다른 노숙인을 돕는, 일종의 봉사 활동이었다. 겨울밤에는 영등포역 주변을 돌며 얼어 죽는 노숙인이 없는지 살폈고, 시설 입소를 거부하고 길에서 지내는 노숙인들을 씻기는 일을 했다. 그때 거리에서 정말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가장 외롭고 차가운 죽음들을 목격하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삶의 의지를 다잡기 시작했다.
_ <의미 없는 인생은 없다>

텔레비전을 보며 쉬는 공용 휴게실에 다다랐을 때였다. 한 노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는 초등학생 정도의 작은 체구였는데, 두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다리를 잔뜩 구부리고 있어서 더욱 자그맣게 느껴졌다. 양쪽 옆구리엔 갈색 털의 곰 인형과 코가 사라진 강아지 인형을 각각 끼우고 있었다. 노인은 내가 다가가자 자동차 대시보드에 붙어 고개를 출렁이는 인형처럼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머리를 움직였다.
대화는 어렵지만 “아!” “아?” 같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다고 했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어 기저귀를 착용해야 했는데, 굳어진 다리가 펴지지 않아서 기저귀 교체할 때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한 요양보호사가 덧붙였다. 기저귀뿐일까, 곰 인형과 강아지 인형에 의지해 간신히 앉아 있는 것조차도 노인에게는 무척 힘겨워 보였다.
_ <선물 같은 이별>

할머니는 가족들이 찾아오면 주로 여러 가지 ‘고발’을 하느라 바쁘다. “얘, 여기는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킨다.” “일주일 동안이나 세수를 안 시켜주지 뭐냐.” “기저귀만 갈고 한 번도 닦아주지 않아서 내가 아주 괴롭다.” 이런 내용들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할머니가 이런 거짓 고발을 하는 이유는 결국 “그러니까 빨리 여기서 나를 데려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발을 접수하는 당사자인 할머니의 아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말들이 거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아들이 요양원 보호자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요양원이 돌아가는 상황이나 할머니의 상태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의 고발은 늘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곤 했다.
_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럴 수는 없다>

두 아이가 가정을 이루고 내 곁을 떠났다. 아들이 함께 살자고 했지만 나는 남편의 땅이 좋았다. 도시의 아파트보다 남편이 손수 지어준 작은 집이 내게는 평안했다. 그렇게 조용히 늙어가다가 남편의 뒤를 따르면 될 일이었다. (…) 서울에 있어야 할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작은 집을 뒤흔들었다. 부엌에서 새까만 연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방문을 열고 나간 나를 보며 큰아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작은아들이었던가. 어떤 놈이 큰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입고 있던 몸빼바지에서 소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있다. 내일은 또 무엇을 잃어버릴지 모르겠다. 내 이름 석 자와 두 아들, 그리고 손주들 얼굴만이라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_ <나, 아직 살아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의 오른쪽 엄지발가락 발톱이 빠졌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자꾸 만지다가 급기야 발톱을 뜯어냈다는 것이었다. 당뇨병은 상처 치료를 더디게 만들었다. 상처가 나을 만하면 할아버지가 상처 부위를 만져서 다시 나빠지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할아버지의 엄지발가락이 썩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된 괴사는 할아버지의 고집처럼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살이 썩어가도 과자를 끊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식습관도 영향을 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엄지발가락이 잘렸다. “거, 발가락 하나쯤은 없어도 돼.” 할아버지는 호기로웠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할아버지의 오른쪽 발목이 사라졌다. 곧 정강이가 없어졌고, 무릎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허벅지를 반만 남기고서야 할아버지의 괴사는 진행을 멈췄다. 할아버지는 더는 복도 손잡이를 붙잡고 걷기 운동을 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_ <다가오는 마지막 시간에>

노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있었지만, 현재 기억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매일 보는 직원들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 요양보호사가 의자에 앉아 문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시려고요?” 두 무릎에 손바닥을 붙이고 언제라도 일어날 준비를 마친 노인이 말했다. “아들한테…… 가야지…… 아들한테…….”
노인에게는 아들 한 명이 있다고 했다. 아내는 그 아들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줄곧 홀로 아들을 키웠다고 했다. 노인은 아들 자랑이 대단했는데, 마치 한 평생의 삶에서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아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 자랑스러운 아들이 낳은 두 아이, 그러니까 손자들 이야기까지 나오면 노인은 흔치 않은 웃음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근래에 노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는데, 그 아들의 발걸음이 딱 끊겼기 때문이다. 노인이 하루 대부분을 출입문 옆에서 보내는 까닭이다.
_ <텅 빈 침대에 앉아서,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 한 분이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 꽤나 빠른 속도였다. 할머니 이마에는 땀까지 맺혀 있었다. 어깨를 지나는 반백의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팽팽하게 당겨 꽁지를 만들어 묶고, 머리 곳곳에는 실핀으로 잔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돈한 할머니는 금테 안경을 코끝에 얹은 채 휠체어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할머니를 가로막고 어디에 가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아이처럼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한테 가요.” 나는 할머니의 생존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잠시 할머니를 쉬게 할 요량으로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어디 계신데요?”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양양에 있어요.”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늘 존댓말을 하는 할머니였다. 양양은 할머니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다.
_ <마지막 소원은 엄마에게 가는 것이다>

그녀는 소나무 껍질 같은 손바닥으로 매일 밤 막내딸에게 남길 옷을 준비한다. 옷장을 뒤져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비싸 보이는 옷을 꺼낸다. 요양원에서 간식이 나올 때마다 서랍에 숨겨놓았다가 옷 보따리 한쪽에 간식을 끼워 넣는다. 그런 뒤에는 이 모든 것을 막내딸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보따리를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든다. 그녀가 매일 밤 남기는 유품은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지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보따리 안에는 50대가 입기엔 무리일 것 같은 할머니 옷들과 양말 두어 켤레, 휴지로 칭칭 싸매놓은 빵이나 사탕이 들어 있다. 언젠가는 그 보따리가 그녀의 진짜 유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녀는 매일 밤 짐을 싸고, 나는 매일 밤 다시 짐을 푼다. 다행히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는 밤사이 사라진 보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_ <낫지 않는 그녀의 아픈 손가락>

상담실로 자리를 옮긴 할머니는 쉬지 않고 두리번댔다. 낯선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할머니는 질문 대부분에 묵비권을 행사했는데 간단하게 ‘네,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는 질문에만 반응을 보였다.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몰라요.” “이분은 누구세요?” “딸.” 이런 식이었다. 딱 한 번 할머니가 길게 말한 적이 있었다. 보호자가 돌아갈 때였는데 할머니는 흰 장갑을 낀 오른손을 들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여기서…… 며칠이나…… 있어야…… 하니?” (…) 할머니는 유리창 너머로 사라지는 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_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

늦은 밤에 누군가 요양원 문을 두드렸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는데 문을 열자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그의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면회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를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말없이 할머니 앞에 서 있던 남자의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 왜…… 안 죽어…….” 나는 의사 표현을 못 할 뿐 할머니가 다 듣고 있음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남자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는 복도로 나와 소파에 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너무 속상해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러고는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_ <절망에서 희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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