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한국인은 참 부지런히 많이도 일한다. 2018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1993시간으로 독일의 1363시간에 비해 1.5배나 된다. 하지만 오래 일한다고 많이 거두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낮다.
2017년 기준 한국의 노동시간당 GDP는 미화 35.88달러로 OECD 평균 52.84달러의 68% 수준에 불과하다. 환산하면 우리가 5일, 40시간을 꽉 채워 만드는 가치를 다른 OECD 국가들은 단 3.4일, 27시간 만에 만드는 셈이다. 우리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주일 동안 해야 하는 일을 다른 OECD 국가에서는 목요일 오전이 가기 전에 다 끝내고 목요일 오후부터 주말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차 한 잔과 함께 여유를 즐길 듯한 북유럽과 비교해보자. 노르웨이의 노동시간당 GDP는 우리의 두 배가 넘는 85.43달러다. 우리 노동자 둘이 달라붙어도 노르웨이 노동자 한 명에 뒤진다. 한 명이 백 명을 상대한다는 ‘일당백一當百’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가 노르웨이 노동자를 상대할 때는 ‘일당 0.5’란 말을 써야 하니 영 체면이 서지 않는다.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야근, 회의, 보고 등 겉으로 드러나는 ‘가지’를 목표로 하는 과정에서 생산성이라는 ‘뿌리’를 놓치기 때문이다. 줄어든 회의 시간이나 야근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이는 생산성이 높아졌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에 가깝다. 측정이 쉽다는 이유로 본질이 아닌 부산물에 집중한다면 불필요한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회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숨어서 회의하거나, 야근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할 일을 집으로 들고 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비효율일 뿐이다.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조직의 궁극적인 목표다. 뿌리가 강해지면 가지와 잎도 건강해진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소극적인 조직도 있다. 밖에서 인재를 데리고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지닌 인재는 드물고 몸값도 비싸다. 액센츄어의 최고 기술 혁신 담당자인 폴 도허티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경영자가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면 된다 생각하지만 아마 새로운 사람들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뜨는’ 기술을 보유한 인재는 데려오고 싶어도 데려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필요에 따라 일회용품을 쓰듯 사람을 샀다 버리기를 반복하는 조직에서는 누구도 몰입하지 않는다. 그런 조직은 아주 작은 위기만 닥쳐도 심각한 인력 유출을 겪게 된다. 폐쇄적으로 내부의 인재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외부에서 새로운 인재를 수혈받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기존 인력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과 조화를 이룰 때 더욱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더 높은 생산성과 몰입을 위해서도 일의 장소와 시간에 대해 다양한 검토가 필요하다. 더는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 일하는 현재의 근무 형태가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많은 구성원이 유연한 근무 형태를 원하고 있다. 2017년 한 조사에 따르면, 재택근무가 가능하다면 현재보다 8% 낮은 급여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결과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가사를 돌보고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며, 생활비가 저렴한 곳에서 살 수 있는 재택근무를 선호하고 있다.
근무 형태는 일과 조직 전반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철저한 검토와 준비가 필수다. 단지 구성원이 원한다는 이유로 근무 형태를 성급히 바꿀 수는 없다. 장점만큼이나 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선도적으로 도입했던 IBM은 재택근무로 구성원 간 협업과 의사소통이 줄어드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2017년부터 일부 직군의 재택근무를 축소했다. 새로운 근무 형태는 도입도 어렵지만 도입한 내용을 되돌리기는 더 어렵다.
가짜 일에 빠져 체력과 역량이 사라진 조직은 위기가 닥쳤을 때 허무하게 무너진다. 위기를 극복할 체력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큰일이 아닌 것도 나에게는 큰일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키아 같은 큰 기업도 가짜 일 앞에서 무너졌다. 조직에 일하는 방식은 재무 건전성 이상으로 중요한 기초체력이다. 과도한 부채를 짊어진 기업이 금융 위기에 흔들리듯, 일하는 방식이 잘못된 기업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가짜 성과주의는 당장 눈앞의 것에 몰입하게 한다. 최저 등급을 받으며 밑을 깔아주던 동료가 조직을 떠났다. 작년에 낮은 등급을 받고 회사를 떠난 동료의 모습이 올해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 긴 호흡으로 제대로 일하고 싶어도 당장 내년에 해고될 수 있다면 눈앞의 목표만 보고 달릴 수 밖에 없다.
가짜 성과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불필요한 내부 경쟁에 힘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성과보다 동료와의 내부 경쟁이 나의 미래를 좌우한다면 어떨까? 누구라도 경쟁사가 아닌 동료에게 눈을 돌릴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 이상으로 남이 못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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