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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 - 송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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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

송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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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원인은 언젠가 자신들이 만들어 놓았고, 나타난 고통들도 카르마를 지워 가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일어난다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현재의 결과가 나타났고, 지금 겪는 고통이 카르마를 지워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의 자세가 바뀐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더 빠르게 카르마를 지우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 깊이 공감할수록 ‘무지가 죄’임을 실감한다.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들도 문제의 근원으로 ‘무지’를 지적하고 있다.

의식 성장이란, 개체의식이 전체의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에고의 생존 본능 프로그램은 너무도 강력하다. 개체의식으로 자기 생존만을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참나의 전체의식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 아픔 없이 순탄하게 될 수는 없다. 고난이 축복이 되는 이유이다. 고난과 역경을 되풀이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배움을 얻지 못한다면 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움을 얻었다면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드라마나 우리 삶이 기본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니, 매 순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선택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드라마는 움직이고 우리 삶도 방향이 정해진다. 선택은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경험으로 축적된 앎의 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부모님과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었다.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무한히 펼쳐져 있다. 여러 종류의 선택지가 있고,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삶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개체는 영靈·혼魂·육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 자체는 참나와 통할 수 있는 창구를 의미하고 활동성은 없다. 마음의 활동은 혼이 하는 것이다. 혼은 에고의 심부름꾼이거나 참나의 심부름꾼이다. 박쥐처럼 왔다갔다하면서 더 힘이 센 편의 일을 하는 것이다. 수련은 혼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에고 편에서 일하고 있는 혼을 참나의 일을 하도록 증거를 들이대며 세뇌시키는 것이다. 참나의 편에 서서 참나의 욕구를 실현해 나가는 삶이 행복한 삶이고, 궁극적으로 나로부터 우주까지 위하는 길이라고 마음에 각인을 시키는 과정이다.

영상 지우기는 에고의 부정 에너지를 지워 내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고, 부정 에너지가 지워지고 나면 허공과의 통로가 열려 간다. 또 통로가 열릴수록 신통한 능력들도 생겨날 수 있다. 참나와 나 사이의 벽은 한 겹이 아니다. 겹겹이 쌓여 있는 벽을 계속 부수고 나아가야 한다. 또한 통로가 열리는 정도도 모두 다르다. 앞으로도 통로를 넓히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누구나 빙산처럼 자신만의 경계를 짓고 살아가고 있다. 본인이 둘러쳐 놓은 두꺼운 껍질에 쌓여서 그 껍질이 벗겨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에고의 욕구들이 경계를 두텁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나를 분리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경계를 짓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경계를 녹여내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있다. 내가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관찰과 판단’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판단을 내려놓고 관찰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내리는 판단은 분리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경계를 두텁게 한다. 반면 판단과 달리 경계를 만들지 않는 행위가 관찰이다.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그만두고 관찰을 하게 되면, 그 경계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은 항상 각자에게 있다. 누구나 에고의 안경을 통해서 주변을 바라본다. 에고의 안경이 두터울수록 존재의 근원에서 유래하고 있는 삶의 원리를 자각할 수 없다. ‘내가 옳다’라는 관점이 갈등 상황 뒤에 숨어 있는 뿌리인 경우가 많다. 내가 옳으니 상황을 통제하려 하고, 상황을 통제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항에 부딪히고, 드러난 저항이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연쇄적으로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이 된다.
‘내가 옳다’의 ‘나’는 에고인 작은 나로, 작은 나의 경험들이 축적된 내가 옳다는 관점은, 허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작은 나이고 작은 나의 개별적인 경험들은 존재의 수만큼 다양하다. 각자의 경험 속에서만 옳을 수 있는 관점들을 나 아닌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무지인지 알아야 한다. 에고의 그 관점도 각자가 깨뜨려 버려야 할 홀로그램에 불과하다. 의식이 성장할수록 아상, 아만, 아집의 모든 관점들은 ‘전체 앎’ 속에서 녹아 버린다. 각자는 그저 존재 자체로 진리이다.

사랑 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내 안의 에너지 수준이 올라가는 것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에 사랑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이다. 신의 본질인 사랑 에너지가 채워지면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의 부정 에너지는 정화되고, 신성이 회복되며 육체 건강은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된 내면의 빛이지만 사랑 지수가 커지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들은 밝은 에너지 전달자가 될 것이다. 빛의 통로가 넓게 열리므로 몸과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허공 어딘가에 파동으로 존재한다. 상념체는 에너지를 가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가 파동 세계의 법칙인 동기 감응에 따라서 움직인다. 누군가가 같은 생각을 발신하면 거기에 동화되어 파동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상념체로 존재하던 파동에너지의 최종 종착점은 어디일까? 이 파동에너지의 최종 종착점은 그 상념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같은 파동을 따라서 여기저기에 붙는다 해도 소멸되지 않는 한, 부메랑처럼 처음 상념체를 만들어낸 사람에게 끌려서 돌아온다. 내가 만들어 놓은 모든 상념체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기억에 남는 문구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는
자기가 주연 배우다.
그것이 신의 뜻이고 섭리다. 
지구라는 삶의 공연장에서
각자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