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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아인슈타인은 왜 양말을 신지 않았을까 - 크리스티안 안코비치(Christian Ankowi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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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왜 양말을 신지 않았을까

크리스티안 안코비치(Christian Ankowi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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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독자는 시험 삼아 가끔씩 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직관적 확신을 흔드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지능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훈련된 두뇌의 문제라는 믿음을 깨부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널리 퍼져 있지만 분명 틀린 가정이다. 뇌는 피트니스클럽에서 운동으로 만드는 근육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의 가정은 잘못되었다. 뇌는 고도로 복잡한 기관이자 네트워킹의 명수다. 뇌가 하는 일은 신체로부터 크게 영향받는다. 이런 신비로운 활동에는 단순히 이두박근을 움직일 때와는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 - <사용설명서>에서

혹시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래요. 우리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보고 얻어낸 은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흥미롭군요. 하지만 그게 정말 중요할까요?’ 그렇다. 정말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판단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토론을 ‘싸움’이라는 말로 묘사하고, 자신이 상대방의 논증을 ‘격파’했다는 비유를 쓰는 사람은 그 비유에 맞게 행동한다. 그는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와 싸워 이겨서 결국 승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논쟁을 싸움으로 표현하는 비유법은 그 논쟁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다. 예를 들어 논쟁을 흥미로운 자극의 ‘교환’으로 보게 하여, 우리를 하나의 자극을 다른 자극으로 바꾸는 사람으로 만드는 가능성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지각방식,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대처하는 방식이 어떤 신체 기반의 비유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 - <과대평가된 머리와 과소평가된 몸>에서

그냥 웃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억력은 웃을 때의 표정을 수년 동안 즐거움이라는 감정과 연결시켜왔다. 몸을 움직일 때의 메커니즘도 비슷하다. 물론 특정 동작과 거기에 해당되는 감정 간의 연결이 웃음과 행복감의 경우보다 조금 복잡하게 진행되기는 한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동일한 감정을 일으키는 동작들이 있다. 그건 우리가 살면서 스스로 습득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일상생활의 일부로 무의식상태에서 연습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손바닥을 내밀어 어떤 사람을 막으면 그 행동은 우리 마음속에 거리감을 불러일으킨다(그리고 상대방에게는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반대로 두 팔을 벌리는 행동은 다정하게 받아들인다는 (그리고 상대방에게는 자신이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마음속에 만들어낸다. - <43개의 근육으로 삶을 바꾸는 기술>에서

우리는 세계를 아주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로 경험하며, 무엇보다 우리 몸의 형상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이 경험을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적용한다. 더불어 기억과 지식 같은 추상적인 것들에도 적용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흔히 기억이 여러 개의 층과 그보다 많은 선반을 보유한 거대한 자료실이나 보관소나 창고라고 상상한다. 저장된 기억은 다시 ‘뚜렷한 경계’가 있는 ‘개별 형상’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기억들을 특정한 저장소에 넣어두었다가 다시 문제없이 꺼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더듬는다’거나(마치 잡동사니가 쌓인 곳을 뒤지듯이), 무엇을 기억에 ‘담아둔다’거나(창고에 보관하듯이), 무언가가 (제대로 닫히지 않은 그릇에서 그러하듯이) ‘떨어져나갔다’는 말을 한다. 어떤 때는 기억을 사람으로 상상하여 거기에 사람이 가진 능력과 특성을 대입한다. 그래서 기억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거나(귀찮은 이웃이라도 되듯이), 과거가 ‘따라와 발목을 잡는다’거나(날쌘 달리기 선수라도 되듯이), 기억이 ‘엄습했다’거나(불청객이라도 되듯이), 기억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뚱뚱한 사람이라도 되듯이)고 말한다. - <기억은 온몸에 숨어 있다>에서

당신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십중팔구 두 손을 이용해 아이디어의 개요를 허공에 그리면서, 상대방이 말 그대로 그 아이디어를 ‘잡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계속 이야기했던 은유,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어놓는 은유처럼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이다. 언어로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가 얼마나 손을 이용한 표현에 의지하는지를,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항상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신문에 게재할 인터뷰를 할 때가 그렇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대화에 푹 빠져들지만, 나중에 녹취록을 작성할 때는 매번 절반 정도의 문장이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 빈자리에서는 우리의 손이 말을 했던 것이다. - <아이디어에게 기회를 줘볼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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