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주변에서 결혼 생활이 망가져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나? 물론 그것도 싫지만 나 자신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해버리면 그것이 일종의 암시가 되어 더더욱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닐까? 다른 사람의 삶을 삼십 분간 요약해서 듣고 나도 그 시간 안에 내 인생을 요약해서 들려준다. 제한된 시간 내에 상대에게 어디까지 깊게 파고들 수 있는지 도전하는 것이 즐거웠다. 맨몸으로 밧줄을 당겨가며 호수 바닥에 스르르 가라앉은 후 순식간에 악수를 나누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은 시간. 거기에는 특별한 반짝임이 있었다.
‘당신을 위해서 진지하게 책을 소개해주고 있는데!’같이 불합리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자. 책은 나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딱히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에게 수행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 감사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만남에 익숙하지 않은 중년 남성들은 ‘알지 못하는 여자와 만난다’가 ‘섹스할 수 있을 가능성’으로 직결되므로 그 외의 발상을 못 하는 것이다. 「X」에서 내가 지금껏 봐온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모르는 남녀가 일대일로 만나도 섹스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평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냥하게 대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최근 몇 달간 그것을 내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쪽이든, 「X」라는 세계에서 벗어나더라도 「X」와 같은 방식으로 부담 없이 누군가와 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X」의 규칙을 다른 곳에도 적용해 본다면 이 세상은 ‘이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버튼을 클릭하고 싶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제 평범한 행복은 필요 없다. 연애도, 결혼도 필요 없다. 돈도, 안정도 필요 없다. 그 무엇도 필요 없다. 그저 오늘 본 빛만을 믿고 살아가자. 내가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 밤이었다.
불성실파 동료였던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고르렴”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준 것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할아버지라면 경야를 빠지고 첫 이벤트를 진행하도록 나의 등을 밀어줄 것이다. 틀림없다. 할아버지의 경야에 참석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못한 선택지가 내 앞에 놓일 때 망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
그러다가 유명한 서점원이 책을 소개하는 페이지를 보고서 실망한 적이 있다. ‘○○만 부 돌파 베스트셀러’나 ‘○○상 수상’과 같이 책의 스펙만을 말하고, 내용에 대해서는 문고본의 표지나 아마존의 소개글에 쓰여 있는 형식적인 내용만 다루었다. 서평가의 독자적인 목소리도, 책의 매력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도 전혀 담기지 않았다. 분명 월등한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을 텐데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이 글을 통해 정말로 누군가에게 책의 매력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서평이 죽어 있다고 느꼈다.
경험을 쌓아가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책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그 사람의 매력에 대해 말한다. 그에게서 느낀 매력과 내가 소개할 책을 언어로 연결한다. 그 책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를 전한다. 그렇게 하면 ‘아직 읽지 않은 책’도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한 부적과 같은 존재가 된다. 꼭 사서 보지 않아도 좋고, 만약 사서 가끔이라도 들여다봐준다면 무척 기쁘리라.
‘돕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구체적으로 타인에게 관여할 수 없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빨리 기운을 찾으시기를 바라요”라거나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라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없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책을 통해서라면 스스로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잘 모르는 사람과 마음을 교환할 수 있다. 책에 관한 상담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녀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일도 없다.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의 등을 조용히 밀어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책이라는 존재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책을 소개할 수 있는 서점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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