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지극히 사적인 우리 딱따구리 부부의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공개하는 건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멀리 울려퍼지는 드럼 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딱따구리처럼, 세상이라는 숲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딱따구리 인종과 소통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인간 딱따구리들이 서로 힘을 내고, 앞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갈 존재 이유를 확인하도록. 딱따구리가 사이좋게 살아갈 나무와 숲이 풍부한 세상을 넓혀가는 건 절대 한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의 드럼 소리가 딱따구리와 이웃하며 살고 싶다는 누군가의 소망에 불을 지핀다면 바랄 나위가 없다._「여러분의 딱따구리는 어디에?」
세상에, 강원도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서울에, 그것도 우리 집 바로 뒷산에 딱따구리가 여러 마리나 살다니. 강릉이나 케임브리지의 딱따구리는 한적한 지방 도시이기 때문에 누리는 호사로만 여겼는데, 서울의 작은 월세 아파트에서 이런 행운이 계속될 줄이야. 심지어 이곳은 청딱따구리와 쇠딱따구리에 오색딱따구리까지 여러 종류가 어느 곳보다도 무척 활발하게 살고 있는 토종 딱따구리 집성촌이다. 이렇게 해서 고척동 집에서 딱따구리가 가장 잘 보이는 나의 작업실은 ‘딱따구리 극장’이라 이름 붙었고, 우리 집도 자연스럽게 ‘딱따구리 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내 이름이랑 얼추 운율도 맞는다. 박규리 박구리 구리구리 딱따구리._「은연중 마음을 빼앗겼다」
주인 내외가 사는 양옥집 2층의 방 세 개짜리 단독이 우리집이었다. 영국의 어이없이 비싼 집세에 비하면 훨씬 적은 돈으로 월세를 얻었다. 그런데 강릉에서는 꽤 놀라운 가격인가 보다. 한번은 택시 기사님이 우리가 내릴 때까지 “아, 40만 원! 아, 40만 원!”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물론 당시 전무하던 나의 수입과 많지 않은 산하 씨의 월급에 비하면 우리에게도 큰 액수지만, 이 돈으로 영국에서는 방 한 칸은커녕 현관 깔개 정도 빌리는 가격이라 일단 살아볼 마음을 냈다. 은행 대출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은행이라는 거대 자본에 이자를 떼어주느니 차라리 집주인이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은가. 은행 없이 우리끼리 해보자구! _「파라파라파라다이스」
이름도 귀여운 참부자표 흙을 한 부대 쏟아붓고서 한 종류씩 오종종 줄을 맞춰, 룰루랄라 신나게 모종을 심는다. 마치 우유 팔러 장에 갔다가 우유 판 돈으로 병아리를 사다 키워 그 병아리를 판 돈으로 예쁜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서는, 춤을 청하는 동네 청년들에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거절할 생각을 하다가 우유병을 다 깨먹은 동화 속의 성급한 아가씨처럼, 나는 신이 나서 부푼 기대를 내비쳤다.
“토마토는 여름에 따 먹고, 고추는 빨갛게 되면 동치미 담글 때 넣을 거야. 바비큐 할 때 여기서 상추랑 치커리 따면 되겠다, 그치?”
그런데 바로 여기서 나와 남편의 의견이 부딪힐 줄이야.
“나는 농사 안 지을 거야. 나는 이거 하나도 안 먹고 다 벌레 줄 거야. 요새 벌레랑 새들이 먹을 거 너무 없잖아. 참새들이 뭐 좀 먹으려고 하면 다 내쫓고. 여기에 ‘벌레 대환영’이라고 플래카드 붙여놓을 거야.”_「턱받침에 벌레 대환영」
이제는 백반집 그랜드슬램 놀이에 재미를 붙였다. 일단 맛있게 밥을 먹다가 하나둘 반찬 그릇이 비워져가면 깨알 하나도 집어 먹겠다는 자세로 하나씩 깨끗이 비우면서 빈 회전초밥 접시처럼 높이 쌓는 거다. 먹는 재미, 쌓는 재미, 쓰레기 줄이는 재미에 쌓다 보면, 대부분 식당 아주머니들은 웃으며 “아이구 그냥 두세요” 하고 말리신다. 심지어 “아예 설거지까지 하시게요?” 하면서 농담을 건네시는 분도 있다. “음식이 맛있어서 깨끗이 다 비웠어요. 잘 먹었습니다!” 하며 식당문을 나서면 식당 아주머니들도 고마워하시고 우리도 기분 좋게 하이파이브다. 오늘도 그랜드슬램!_「백반집 그랜드슬램」
내 행색을 보자 하니, 세 명의 주인을 거친 카키색 외투에 스와핑 카페에서 자전거 수리 공구 세트랑 맞바꾼 자주색 코듀로이 바지, 시고모님께서 물려주신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걸치고, 애니가 물려준 모직 아이보리색 목도리와 연보라색 목도리 두 개를 이어 붙여 둘렀다. 궂은 날씨에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 편한 차림이 선택 기준 1순위이기는 해도 나름 색이랑 소재랑 맞춘 건데, 그렇게 이상한가? _「채러티 부인의 사랑」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듯이 나와 고슴도치가 서로 꼼짝하지 않고 얼음 대결을 펼친다. 좀 버텨볼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얘 지금 얼마나 무섭겠어, 보내주자.’ 일부러 알아채라고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저만치 멀리 걸어갔다. 돌아보니 고슴도치도 이내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장난기가 발동해 다시 고슴도치에게 다가갔다. 고슴도치는 이내 또다시 숨죽이며 멈춰 선다. 아, 미안, 이제 그만할게. 가던 길 가렴! 우연한 만남 덕분에 잔뜩 찌푸렸던 마음이 어느새 녹아버린, 고슴도치의 밤이다. _「고슴도치의 밤」
한번은 정부에서 파견한 저출산 설문조사위원이 강릉 집에 찾아왔다. 마침 우리 둘 다 집에 있었고 주제도 흥미로워서 중년의 인상 좋은 아주머니를 흔쾌히 집으로 들어오시게 했다. (…) 설문 끝에 아주머니께서 물으셨다.
“요새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네, 무척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점점 없어져서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든다고요.”
“네, 바로 그거예요. 지금 인구가 너무 많아서 복닥복닥 문제가 많잖아요. 교통 체증도 심하고, 아파트 짓느라고 산도 다 깎고, 다 먹이느라고 농사지을 때 농약 막 치고요, 쓰레기 완전 넘쳐나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에요. 얼른 줄어야죠!”
아주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황당하게 나를 쳐다보시고, 뒤에서 듣고 있던 산하 씨는 웃음을 참느라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_「21세기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
인류에게 희망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삶의 작은 실천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삶의 태도와 일터에서 변화를 일으켜 우리 주변의 동물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꾸릴 수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힘을 모아 기후변화를 막고 숲과 동물들을 보호하는 일들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헤어짐의 슬픔보다는 다시 만나는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_「울 준비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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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또독똑 두유 워너 빌더 나무집? 귀엽고 상쾌한 에세이 [아무튼, 딱따구리] (feat.서울도서관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2편)
사람들 막 책 고르러 지나다니고 막 대출하고 있는데 그 앞에 서서 촬영하는 거 갱장히..쑥스럽더라고요.. ※이 영상은 서울도서관의 제작지원금을 받은 공공 캠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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