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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단골이라 미안합니다 -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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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이라 미안합니다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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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의 동력은 적절한 공간과 음악과 커피다. 이는 뼈, 신경, 근육이 맞물려야 인체가 움직이는 이치와 같다.

한번 수준을 높이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힘든 줄만 알았지 한번 맛을 알면 그 계열을 다 끌어안을 수 있게 되는 줄은 몰랐다. 커피 없는 카페 생활에서 마침내 커피 생활로 들어섰다.

매사 지나치게 따지며 산다고 걱정하는 이여, 난 ‘모든’ 일에 예민한 게 아니라 특정영역에만 그런 것이다. 매번 다른 커피 맛이 별로 거슬리지 않아 첫 드립을 시작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내려 마신다.

점심시간을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밥 먹으러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 사이를 걸을 때면 사회의 일원이 된 듯 야릇한 쾌감이 들기도 한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덕분에 느끼는 여유. 진짜 직장인이었다면 다 때려치우고 싶겠지. 인류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기분은 묘하다. 이 많은 사람이 밥 먹은 다음엔 커피를 마시러 갈 터. 이들이 제각각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내 자리가 난다. 조금 늦게 먹으러 나온 직장인을 피할 요량으로 1시 반 지나서야 점심을 먹는다.

집에는 없고 카페엔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의외성이다. 집은 늘 그대로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내가 켠 전등만 불이 들어오고 내가 튼 음악만 나오고 내가 둔 물건만 쌓인다. 카페는 뜻밖의 요소로 가득하다. 어제는 없던 꽃이 꽂혀 있기도 하고 처음 듣는 음악이 흐르기도 수십 년 전에 듣던 음악이 나오기도 한다. 카페에 드나드는 다양한 사람을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를 새로이 보기도 한다. 들릴 듯 말 듯한 옆자리의 대화가 흥미를 끌기도 하고 처음 보는 옷이나 가방은 어디서 샀는지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기도 한다. 가끔 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형편이 나아진 지금도 눈만 뜨면 카페에 간다. 카페를 거실로 쓰면 좋은 이유가 또 있는데, 분위기를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지 않아도, 소파를 새로 사지 않아도, 단지 다른 카페에 가면 거실이 바뀌는 셈이다.

카페에서 듣기 좋은 음악은 하던 일을 잠깐 멈추게 하는 음악이다. 어떤 선율과 사운드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시공간을 잠시 초월해 정신이 배회하도록 이끈다. 음악 산책은 차곡차곡 쌓여 이면에 산재한 갖가지 생각 조각들을 휘저어 수면에 떠오르게 한다. 그 조각들이 당면한 숙제와 결합해 새로운 분자식을 구성하는 순간이다. 지나친 집중은 삶을 힘들게 하지만 집중하지 못하는 삶 역시 힘들것 같다. 커피와 음악은 느슨함과 집중력을 공존하게 한다.

한 카페의 화장실에 가니 이솝 핸드워시 통에 다른 물비누를 채워놓았다. 일상 속에 각양각색으로 자리 잡은 포촘킨파사드. ‘인스타핫플’은 포촘킨파사드의 화신이라 일러도 될 만하다. ‘멋진 공간이 있는데 사진도 잘 나오더라’가 아니라 애초에 소셜미디어에 올릴 사진을 위해 기획된 공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에서 ‘싼값의 다홍치마’가 많아지더니 ‘어쨌든 다홍치마’ 판이 된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문구

몸의 상태는 마음에 달렸고
마음의 상태는 몸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