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 - 법상

728x90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

법상

책 읽으러 가기

책속에서

홀로그램, VR, AR, 실감 콘텐츠 등은 모두 실재처럼 보이는 가상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실 제로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가짜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
첫 장부터 갑자기 신문 기사 같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이렇게 현대사회를 들썩이게 하는 가상현실 기술이 사실은 너무도 이 현실 세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신도, 당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인연 맺고 사는 타인들도, 또 이 세계도 모두가 저 홀로그램 입체상과 같은 가상의 현실이다! 다만 인연이 임시로 모여 진짜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세상이, 나와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등 지금까지의 삶과 이 세상 모든 것이 사실은 실재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연기되어진 것일 뿐이다!

이런 우주는 영원할까? 그렇지 않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해 가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한다. 별과 별 사이의 성간물질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로 모이고, 별에서 오는 광압이 가해지면 성간물질은 밀집과 수축을 가속하면서 내부 압력과 온도가 올라가고 1000만 도 이상 온도가 상승하면 핵융합을 시작해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 즉 별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별은 수소가 헬륨으로 바뀌는 핵융합을 계속 일으키면서 한동안 크기와 빛의 밝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다가, 결국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게 되면 빛은 소멸하고 별의 일생은 끝난다. 이처럼 별도 성주괴공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태양도 이미 생성되고 나서 50억 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하며 성주의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다시 50억 년 후가 되면 수소가 다 소멸되어 괴공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고 하니, 미시세계와 같이 거시세계인 우주 또한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제행무상인 것이다.

나와 세계는 무상(無常)하게 변해간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여기에는 좋거나 나쁜 것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다. 생겼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무상에는 그 어떤 분별이 없고, 의미가 없다. 그저 인연 따라 제 시절인연에 맞게 있다가 가면 그뿐이다.

매 순간 변화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보라. 변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음’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변하도록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정말로 내가 있다면 이것이 나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처음 태어날 때 당신은 스스로 원해서 태어났는가? 외모와 성별, 나라, 적성, 취미, 재능 등을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났는가? 아니다.
당신은 키를 스스로 선택했는가? 외모와 얼굴을 스스로 선택했는가? 거친 피부를 스스로 선택했는가? 나이 드는 것은 어떤가? 아침에 밥을 먹고 나면 소화를 내가 시키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떨까?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저절로 된다. 거기에 내가 관여할 수는 없다.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늙는 것도 병들고 죽는 것도 시절인연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 사실은 거기에 ‘나’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육내입처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외부의 세계[六外入處]를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 뿐이다. 내가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세상 이라고 여기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펼쳐진다.
쉽게 말하면, 나도 이 세상도 모두 독립적으로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연기하여 존재하는 인연가합의 존재일 뿐이다. 육내입처가 있으므로 육외입처가 있고, 육외입처가 있으므로 육내입처가 있을 뿐이지, 육내입처와 육 외입처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세계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볼 때 보이는 것도 함께 연기하는 것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을 버려라’, ‘알음알이를 놓아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분별심, 알음알이가 바로 식이다. 이 말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전혀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일으켜 쓰되 그것이 실체인 줄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지금 이 순간도 멸성제에 이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제 바로 당신이 이 자리에 이를 차례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길은 있다.
이러한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한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이다.

정사유는 특정하게 사유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정사유’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그 생각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본질이 연기이며 무아이기에 허망함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이를 선(禪)에서는 생각이 나오기 이전 자리를 확인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되면 올라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생각이 올라온다고 해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붙잡아 나와 동일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를 때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거나, 이기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이기적이다’라고 여김으로써 그 올라오는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정사유가 아니다.

주객의 분별, 자아관념이라는 허망한 착각을 내려놓고,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게 된다면, 모든 대상이 사실은 대상이 아니었음이 문득 자각될 것이다. 이것이 곧 법(Dhamma)의 확인이다. 올바른 자각, 정념은 ‘이것’이라는 주관이 ‘저것’이라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법을 보는’ 것이며, 자기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확인하는 것이며, 보이는 것이 그대로 보는 것이 되는 불이법의 자각이다. 일체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들, 모든 존재(dhamma)가 그대로 법(Dhamma)이다.

이 책을 추천한 크리에이터

이 책을 추천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