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그 일을 겪고 난 후부터 환자들을 대하는 내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환자의 나이와 성별, 직업, 또는 이전 의무기록까지 불문하고, 그가 범죄자이든 자살 기도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환자는 우리의 보살핌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이 여성 사례의 예기치 않은 반전은 의사로서 나의 직업관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인생관까지 바꾸어 놓았다.
“좋아요. 제가 한번 직접 해보죠, 뭐.”
그에게 이렇게 말하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건장한 체격의 다 큰 성인이 작은 플라스틱 조각 하나 때문에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흘렸다. 마침내 신뢰할 만한 의사를 만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의사로서 깊이 있게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분위기는 일순간 달라졌다. 병실에 활기가 돌고 기쁨과 환희에 들뜬 가족들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진정하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나도 그들의 행복감에 함께 젖어들었다. 처음에 눈만 꿈벅이며 가만히 있던 환자 역시 아기를 보자 경이로운 반응을 보였다.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래된 생명은 떠나가고 이제 새로운 생명이 오는구나!”
이제 나는 말기 질환을 앓는 젊은 환자들을 보면 가능한 한 오래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침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길 응원하고, 되도록 건강한 음식을 먹게 하면서 고통을 경감시켜 주려 노력한다. 그들이 너무 빨리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도록,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어느새 13년이 지난 지금, 크리스토퍼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를 6개월에 한 번씩 본다. 아주 천천히 그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밤에는 인공호흡기가 필요하고 성대에도 문제가 생겨 말도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대학에 간 순간부터 우울증은 사라졌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장벽 뒤 덫에 걸린 슬픈 얼굴을 우울증이라는 형태로 드러냈지만, 장벽이 제거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 또는 사랑하는 이와의 마지막 밤은 언제든 결국 오게 된다. 평소 우리는 그 순간이 언제가 될지 가늠조차 못 한 채 산다. 하지만 그는 그걸 보았던 셈이다.
그는 정직하게 말해주어서 고마웠다고 나에게 인사했다. 이르마가 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와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서.
내가 중환자실에 들어서던 순간을,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한네케가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왔지요.”
그 말이 모든 걸 대변하는 듯했다. 그때 그 병실에서 그녀가 내게 보였던 확신과 신뢰는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절실했다. 두 아이와 홀로 남겨진 채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맞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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