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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길은 여전히 꿈을 꾼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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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여전히 꿈을 꾼다

정수현

여행이 멈춘 시대, 다시 떠날 그날까지 간직하고 싶은 길 위의 이야기

세계 곳곳을 맨몸으로 걸으면서 삶의 풍경을 수집해온 정수현의 여행에세이.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제가 여행을 기약하고 있다면 되새겨 봐야할 이야기들 - 정수현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풍경 이면에 스민 삶의 아픔들을 느끼며 스페인 통치하의 잉카, 이국의 땅에서 안중근, 윤동주가 걸었던 길을 걷는다. 히말라야에서 유럽, 남미까지 그의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길과 삶, 역사가 어우러져 마음속에 스미는 풍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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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셀라론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퍼포먼스를 펼치며 그들은 계단을 더욱 다채롭게 물들여가고 있다. 원색의 색감이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에 한번 취하고, 괴짜 예술가의 농담 같은 죽음에 한 번 더 취해 계단 주위를 서성거렸다.

휴식이든 도망이든 변화를 띄워 올리기 위해서는 달릴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가 필요하다.

아야 소피아 본당에는 그 유명한 '공존'이 있다. 돔 천장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각각 알라와 선지자 마호메트를 의미하는 문양이 걸렸다. '대립하는 두 종교의 화해'라는 교훈적인 수식을 붙이지 않더라도 예술적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장면. 사실적인 묘사와 상징적인 기호가 어우러져 세상에 없는 새로운 아우라를 창조해내고 있다. 사람들은 공존의 비밀에 대한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스페인 통치하에서 잉카의 후예들은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1780년, 쿠스코 출신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주축이 되어 농민봉기가 일어납니다. 초반에는 총독을 사로잡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이듬해 진압당하고 맙니다. 콘도르칸키는 사지가 찢기는 참형을 당하여 쿠스코 광장에 효수되었습니다.

후안 디에고 콰우틀라토아친.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된 원주민이었습니다. 1531년 겨울,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테페야크 산을 넘어가던 디에고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원주민의 언어로 '내가 비탄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이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했다지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는 '안중근! 이토! 빵!' 이런 파열음을 내뱉었고, 그는 양손을 들어 올려 단호하게 엑스(X)자를 그릴 뿐. 소란이 길어지자 영어를 할 줄 아는 다른 직원이 나왔고, 비로소 1번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어느덧 몸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우리 복장이 가관이다. 긴팔 옷에 점퍼까지, 눈 쌓인 히말라야의 이미지만 생각하고 겨울복장으로 무장했던 것. 그런데 사방에는 노란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그랬다. 우리는 트레킹을 하는 거였다. 산정(山頂)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표범을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평소에 뒷산도 못 오르던 중년여성이 무탈하게 히말라야 트레킹을 소화하는 반면, 심폐지구력 뛰어난 마라톤 선수가 도중에 쓰러져 실려 내려가는 일이 발생하는 거란다. 아직까지 현대의학은 고산병의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고 진단법과 치료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부터 1973년 사이에 베트콩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미군은 라오스에도 폭탄을 쓸어 부었단다. 9년 동안, 24시간 8분마다 한번씩, 출근도장을 찍듯 투하한 폭탄은 모두 2억6천만 개. 육중한 쇳덩이를 모두 받아낸 숲과 들판은 말라 죽었고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음의 파편들을 떼어다가 숟가락을 만들었다나.

이집트 룩소르 신전 앞에는 하나의 오벨리스크*만 외로이 서있다. 처음에는 분명히 한 쌍이었을 텐데…… 잃어버린 짝꿍은 파괴되거나 약탈되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사연을 듣고 나니 황당하다. 19세기에 이집트 총독이 프랑스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로비 차원에서 프랑스 왕에게 선물했단다.

늦은 오후, 갠지스강의 일몰을 보기 위해 철수 씨의 나룻배를 타러갔다. 열두 살 때부터 25년째 뱃사공을 하고 있다는 철수 씨. 그는 오래전 이곳에 왔던 한국인 탐험가와의 인연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단다. '철수'는 그 탐험가가 붙여준 이름. 독학으로 배운 것치고 철수 씨의 한국어 실력은 괜찮았다.

'트로이도 함락되었고 로마도 함락되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이 말은 도시를 만들고 지켜냈고, 또 지탱하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돌려야할 헌사일 것입니다.

혹자는 이제 자유여행의 시대가 끝났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이 우리를 떠났습니다'로 시작하는 어느 항공사의 광고처럼, 떠나간 것들은 반드시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을 믿는다. 길을 나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돌아온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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