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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아무튼, 피트니스 -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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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피트니스

류은숙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
아무튼 시리즈는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시인, 활동가, 목수, 약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개성 넘치는 글을 써온 이들이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책에 담아냈다. 길지 않은 분량에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져 부담 없이 그 세계를 동행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이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하나의 시리즈를 만드는 최초의 실험이자 유쾌한 협업이다. 색깔 있는 출판사, 개성 있는 저자, 매력적인 주제가 어우러져 에세이의 지평을 넓히고 독자에게 쉼과도 같은 책 읽기를 선사할 것이다.
이 책은 중년의 인권활동가가 쓴 피트니스에 관한, 피트니스를 애정하게 되기까지에 관한, 체육관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마주치는 삶의 풍경에 관한, 그리고 중년의 비혼 여성으로서 나이 들어감과 몸을 받아들이는 것,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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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다시 운동을 시작한 날, 막 입학한 새내기의 설렘으로 체육관에 들어섰다.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 전구를 갈고 있던 나이스가 활짝 웃었다. 다시 만나게 돼 반갑다고 했다. 당분간은 살살 걷기만 하라고도 했다. 나는 트레드밀을 시속 3.5킬로미터로 걷는 달팽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느려도 나는 움직이고 있다. 다시 움직인다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분홍 신을 신고 무대에 오른 발레리나처럼, 운동화를 신고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뭔가를 몸에 새긴 것이다. 몸에 새긴다! 이 말이 참 좋다.

무거운 걸 들어 올릴 땐 자기 한계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자기 힘의 최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면서도 더 했다간 무리일 것 같은 순간을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무리하게 들려다간 바벨을 놓쳐 발등을 찍을 수도 허리가 나갈 수도 있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무리인 것 같기도 한, 그 애매한 짧은 순간에 자기 역량에 솔직해지는 것, 도전할 줄 알면서도 물러설 줄 아는 것! 아, 지금 나는 도 닦는 연습하는 건가.

샤프트만을 들다가 바벨을 조금씩 추가해 무게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면 하늘이 무너진다는 상상을 한다. 버텨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느낌이 온다. 아아! 하늘도 무너지는구나! 아아!! ‘하늘이 무너지면’ 자칫 바벨에 깔릴 위험이 있다. 그렇게 하늘이 무너질라치면 나이스가 곁에서 바벨을 잡고 버텨줬다.

삶이 지루하다 해서 늘 익사이팅한 경험을 만들고 매일 여행을 떠날 순 없지 않은가. 살아가려면 늘 고만고만한 일상과 맞물려 돌아가는 소소한 성취에서 기쁨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피트니스의 지루함은 삶의 그런 모습과 닮아 있다. 피트니스의 문제라면 잘하게 될수록 복근 운동 세트 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오히려 할 게 더 늘어난다는 점이다(아차, 삶도 그런가. 삶에서도 뭔가를 잘할수록 더 많은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 아닌가.)

어떤 동작을 몸이 익히는 순간은 숱한 반복 후에야 찾아온다. 트레이너는 그 반복을 함께 버텨주는 사람이다. 안 될 것 같고 꽉 막힌 것 같은 동작이 확 뚫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성취 자체만큼이나 기쁘다. ‘이 정도밖에 못해?’ ‘일을 이따위로 해서 되겠어!’ 타박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잘하셨어요’라고 돌아오는 칭찬, 어릴 때 고무도장으로 ‘참 잘했어요’를 네모 칸에 채워가던 기분이 난다. 그런 도장을 매번 말로써 찍어주는 동행이 있어 참 좋다.

인생에도 퍼스널트레이닝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지.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또 다른 누군가가 서로에게 서로의 PT가 되어주니 살아가는 것이겠지.

어느 날 스테퍼를 밟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손이 쑥 들어왔다. 기겁을 한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아저씨가 내 발을 강제로 미는 것이다.
“발을 이렇게 놓고 해야지.”
이두 운동을 하고 있을 때는 또 다른 아저씨가 역시 반말로 불쑥 끼어든다.
“손목이 휘었잖아.”

100미터 달리기 25초로 0점, 윗몸 일으키기 0점, 매달리기 0점, 던지기 0점. 그나마 점수를 딸 가망이 있는 건 완주만 하면 점수를 주는 800미터 달리기였다. 뛰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줄 알았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팀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점수를 주는 선생님이 헷갈려 내 점수를 빼먹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등짝을 맞았다. 억울했다. 게으름을 부리거나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야단을 치고 못살게 구는지.

‘젊어 보인다.’ 이 마약과도 같은 말. 황홀하다. 그러나 약이 아닌 독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흔히 들 칭찬으로 한다. 과연 칭찬일까? ‘활기차 보이세요’라고 해도 되는데 ‘젊어 보이세요’라고 말한다. 그냥 ‘멋져 보인다’고 해도 될 텐데 ‘그 나이대 또래처럼 안 보이고 멋져 보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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