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제국주의
한중섭
북저널리즘 시리즈 40권. 인류의 역사에서 도출한 불변의 가치들을 바탕으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몰고 올 변화의 시대를 세밀하게 전망한다. 패권을 장악하려는 제국의 움직임에 좌우되는 세계의 질서,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온 과학과 자본주의에서 출발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가치의 저장이라는 화폐의 본질을 짚어 나가면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새로운 제국의 지배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이 그랬듯, 블록체인도 탈중앙화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국 거대 기업들의 통치 수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21세기의 제국은 정보를 넘어 자본의 흐름을 감시하는 시스템을 장악할 것이다.
책속에서
“변질된 인터넷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이상주의자들이 다시 한번 사이버 유토피아를 상상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2008년이다. 이상주의자들은 인터넷 산업 발전 초기에 유행했던 분권화, 탈중앙화라는 해묵은 가치를 다시 거론하면서 이 기술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것이라며 흥분했다. 확실히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20~40년 전 사람들이 인터넷의 긍정성에 열광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에 열광하고 있다.”
“암호화 기술과 사이퍼펑크가 없었다면 비트코인은 탄생하지도, 초기 네트워크를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초기 인터넷 산업과 마찬가지로, 초기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이끈 것은 컴퓨터 기술에 능통한 괴짜들이었다.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생기자 괴짜들은 컴퓨터를 사용해 비트코인을 채굴해 보기도 하고 서로의 지갑에 전송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장난감에 재미를 붙였다. 당시에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비트코인의 가치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 또한 이들의 흥미를 끌었다. 비트코인의 태동기에는 사용처가 전무하고 가격도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초기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괴짜들의 호기심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중 누구도 비트코인이 이토록 상당한 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이상주의자들은 블록체인 기술로 사이버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 같다. 이들은 인터넷 태동기에 인기를 끌었던 탈중앙화라는 해묵은 개념을 다시 꺼내 블록체인 기술의 긍정성에만 주목한다. 블록체인 기술이 중앙 권력을 해체하고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며 다수에게 더 수준 높은 자유와 권리를 부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탈중앙화가 본격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탈중앙화는 유토피아다. 다시 말해 실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월가의 금융 자본과 실리콘밸리의 산업 자본이 비트코인 및 블록체인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 세계 가치의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미국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은 서로의 군함이 필요하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미국의 상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의 규칙을 주도면밀하게 설계하고 있다. 언젠가 미국 내 디지털 자산 관련 규제가 더욱 분명해지면, 미국의 상인들은 의기투합해서 차차 비트코인 생태계를 합법적인 방식으로 지배하려 들 것이다.”
“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울 때마다 비트코인은 빛을 발했다.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북한의 핵 실험 등 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비트코인의 가격은 상승했다. 이는 비트코인의 안전 자산으로서의 잠재력을 시사한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안전 자산으로 취급되는 금이나 달러에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폭압적인 정권이 집권하는 경우 국가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시민들의 재산을 강탈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게다가 전 세계 17억 명의 사람들은 은행 계좌조차 없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소말리아나 온두라스 시민들이 발 빠르게 안전 자산으로 가치를 이전하고 재산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가치의 저장과 이전이라는 관점에서 비트코인은 훌륭히 제 기능을 한다. 아무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참여해 자기 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금과 확연히 다르다. 비트코인으로 가치를 저장한 개인은 개인 키만 알고 있으면 제3자의 간섭에서 벗어나 전 세계 어디든 전송할 수 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를 떠나 해외로 이민 간 사람들은 돈을 번 뒤 본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를 대기 위해 비트코인을 활용한다. 베네수엘라 시민들은 부패한 국경 수비대나 막대한 수수료를 뜯어 가는 환전상을 거치지 않고도 비트코인을 통해 경제 주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달러 이후의 글로벌 통화 시스템은 어떤 모습일까? 결국 세계 화폐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IMF의 SDR(Special Drawing Right)이 발전해 이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는데, 세계 화폐가 출현한다 하더라도 각국의 중앙은행은 나름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세계가 달러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각국 중앙은행이 각자의 통화 정책을 구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트코인은 새롭게 등장할 글로벌 통화 시스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중앙은행과 IMF는 비트코인을 준비 통화에 편입시키기 시작한다. 뒤늦게 비트코인의 잠재력을 깨달은 국가는 비싼 값을 치르고 비트코인을 매집한다. 비트코인은 이제 디지털 세계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는 화폐로 인정받는다. 이때부터 금과 비트코인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비트코인이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은 창조자의 부재에 따른 중립성이다. 모든 알트코인의 창조자들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우월성을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는 반면, 비트코인의 창조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밋업이나 콘퍼런스에 참여해 비트코인의 발전 방향에 대해 그럴싸한 연설을 하지 않는다. 비트코인은 중립적이며 전적으로 대중의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다른 알트코인들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비트코인만의 이점이다. 비트코인이야말로 분산적 신뢰의 시대에 적합한 돈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소비자들은 스타벅스가 주는 쿠폰과 편리한 서비스 때문에 스타벅스 앱을 이용한다. 스타벅스는 각종 프로모션을 통해 자동 충전을 유도하고 자주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충성도 높은 소비자들은 기꺼이 스타벅스 앱에 돈을 예치한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16년 스타벅스의 예치금은 12억 달러(1조 4000억 원)로 미국의 웬만한 중소 은행 예치금보다 큰 규모다.”
“페이스북이 리브라를 통해 구현하고 싶은 것은 자사의 메신저를 중국 텐센트의 위챗처럼 만드는 것이다. 위챗은 소통뿐 아니라 금융, 교통, 쇼핑, 게임 등 다양한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특히 금융 서비스가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페이스북은 왓츠앱, 페이스북 메신저, 인스타그램 메신저를 운영해 왔지만 기대만큼 수익화에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페이스북은 2019년 2월 자사의 메신저 기능을 통합할 것이라고 발표하며 메신저를 본격적으로 수익화할 것임을 암시했다. 리브라는 페이스북의 메신저 굴기에 힘을 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비트코인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가장 공격적으로 관련 기업과 인프라에 투자하고, 가장 선진화된 제도를 꾸리고 있고, 가장 활발히 스타트업과 대기업이 발맞춰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으며, 가장 적극적으로 규제 표준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가 미국이다. 비트코인 열풍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 미국은 게임의 규칙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리하게 바꾸고 있다. 이미 눈치가 빠른 일본과 일부 유럽 국가들은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관련 규제 완화에 시동을 걸고 미국의 뒤를 따르고 있다.”
“블록체인은 금융 산업을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에 귀속시킬 수 있다. 현재 금융 산업이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은 단지 홍보용 목적으로 유튜브나 페이스북 계정을 생성해 구독자 및 조회 수를 늘리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향후에는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이 직접 은행 역할을 수행하면서 현지 은행과의 경쟁이 격화될 수 있다.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이 금융 상품 마켓 플레이스 기능을 하게 됨에 따라 현지 금융 기업이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의 하청 기업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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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은 사기가 아니다 | 디지털 '쩐의 전쟁' | 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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