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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나 홀로 읽는 도덕경 -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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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읽는 도덕경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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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인간이 책임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펼치는 역사는 신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믿음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로 넘어갔다는 말과 같아요. 신이 주인인 시대에서 인간이 주인이 되려는 시대로 넘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생각하는 능력으로부터 시작돼요. 이 능력이 가장 고도화된 것이 철학이죠. 철학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역사는 신의 역할과 지위가 축소되고 인간의 역할과 지위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계속 이동합니다._「덕이 등장한 의미는 무엇입니까?」에서

대답과 질문을 놓고 봤을 때,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 덕의 활동에 가깝습니다. 대답은 이미 있던 이론과 지식을 먹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기능적 활동이지만, 질문은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때 나오는 힘, 즉 궁금증과 호기심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죠. 자신에게만 있으면서 자신을 활동하게 하는 힘이니까 덕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위대한 것들은 거의 다 질문의 결과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거의 없습니다._「덕이 등장한 의미는 무엇입니까?」에서

인간은 ‘없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새로움’이나 ‘창의’나 ‘창조’ 모두, ‘아직 없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 현실화된 것이죠. 보이고 만져지고 확실히 있는 것만 다룬다면 새로운 이론을 생산해내기 어렵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도 사라져요. 예술도 사라지고요. 질문, 궁금증, 호기심, 지식의 생산, 창의성, 상상력,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안 보이고 없는 세계를 꿈꾸는 것들입니다._「노자의 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에서

노자는 자연에서 발견한 자연의 운행 원칙을 인간 세상에 적용하자고 해요.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그냥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건 노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노자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적으로 파악한 자연의 운행 원칙을 인간의 삶 속에서 구현하자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으니까 노자 사상을 반문명론으로 오해하고,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삶을 매우 큰 깨달음에 이른 것으로 착각하죠. 노자는 자연을 추구하고 문명을 배격한다는 식의 말은 노자를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_「노자에게 자연은 무엇입니까?」에서

노자의 눈에 비친 물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는 물의 특성이 바로 이것이에요.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있는 시스템 안에 끼어들기보다는 아무도 가지 않는 전혀 다른 길을 자신의 선택지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이미 차지한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상하고 어색하게 보이는 바로 그곳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그곳은 누구도 먼저 차지하려고 덤비는 곳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차지하려고 덤비지 않는 이상한 곳, 거기에서 혁신의 씨앗이 남몰래 자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기운은 누구나 다 아는 곳이 아니라, 아직은 비밀스럽게 숨어 있는 이상한 곳에서 시작되지요. 그 이상한 곳에 도달하는 힘을 물이 가지고 있습니다._「노자 사상에서 물은 어떤 특성을 갖습니까?」에서

공자는 ‘우리’를 정하고 그 안에 ‘나’들을 편입시켜야 하므로 ‘나’들은 ‘우리’의 이념에 맞는 ‘나’들이 되어야 한다 하고, 노자는 ‘나’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가는 ‘우리’를 추구한다고 하기 때문에 혹자는 공자는 ‘우리’를 긍정하고 노자는 ‘우리’를 부정한다고 가볍게 말해버려요.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우리’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공자는 문명을 긍정하고 노자는 문명을 부정했다고 오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노자나 공자 모두 문명을 긍정했어요. 문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문명을 건설하려 했을 뿐입니다._「노자에게 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에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문장은 노자의 철학을 정말 제대로 함축하죠. 무위하라, 그러면 무불위, 즉 모든 일이 잘된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노자의 시선은 ‘무위’보다는 오히려 ‘무불위’를 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무불위’는 보지도 않고, ‘무위’만 보죠. 그것은 마치 노자를 앞서는 것, 갖는 것, 온전해지는 것보다는 물러서는 것, 주는 것, 구부리는 것을 강조한 사상가로 보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노자는 일을 안 하려는 자가 아니라 일을 잘하려는 자였어요. 화살을 앞으로 멀리 날려 보내려면, 활시위를 뒤로 당겨야 하지요. 두 동작은 활을 잘 쏘기 위한 한 벌의 동작입니다. 노자는 활을 아무렇게나 쏘려는 사상가가 아니라 정확하게 잘 쏘려고 했던 사상가였죠._「구부러짐이 자연을 따르는 것입니까?」에서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개념을 여백이나 틈 없이 사용해서는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세계는 서로 여백을 나누며 틈을 허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유무상생인 거죠. […] 시인은 언어를 재배치하고, 위치를 다르게 하며,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과 여백을 남깁니다. 그 틈과 여백 사이에 소리를 심죠. 언어들 사이의 남겨진 틈과 여백들이 소리를 입은 개념들에 탄력을 주어 드러나지 않거나 아직 없는 진실들을 튀어오르게 하죠. […] 협치나 포용이나 하는 것들은 배척이나 편 가르기에 비해 얼마나 큰 감동을 줍니까? 또 얼마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겠습니까? 다 여백과 틈에서 빚어진 감동입니다._「국가의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에서

골프를 칠 때도 공을 끝까지 보고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고개를 든다는 것은 클럽에 공이 맞기도 전에 내 공이 어디로 갈지 먼저 보려는 거잖아요. 누구나 이런 어리석음을 보이죠. 그러나 공이 날아갈 먼 곳을 미리 보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클럽이 공에 맞는 것만 보면 공이 더 정확히 맞고 더 멀리 가거든요. 공에 클럽이 맞기도 전에 공이 갈 곳을 미리 쳐다보려 하면, 공이 제대로 맞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공을 저 멀리 쳐야겠다거나 세게 쳐서 저 멀리 보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잘 되지 않아요. 운동의 기본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게 무위無爲예요. 그래서 노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혹은 무위하기만 하면 다 잘된다고도 새길 수 있죠._「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에서

우리는 보통 어린아이를 아직 어른이 덜 된 상태로 보죠. 어른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이고, 어린아이는 아직 어른이 덜 된 부족한 존재이기에 어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린아이는 항상 부족한 상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어른이 되려고 분발해야만 합니다. 어린아이로서는 한 번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해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자존감이니 자신감이니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신감과 자존감이 없으면 창의성도 있을 수 없고 질문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 하기나 대답하기만 잘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의 행복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어른이 덜 된 상태가 아니라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의 행복은 어린아이에게 목적 그 자체입니다._「무위와 갓난아기 상태는 어떻게 연결될까요?」에서

노자가 궁극적으로 해체하려고 했던 것은 모든 구축構築이에요. 즉 본질주의를 해체한다는 거죠. 제가 볼 때는 노자 사상이 가진 해체주의적인 특성, 즉 관계론적 특성이 노자 사상의 현대성을 보여주는 데 중요한 점입니다. 노자의 사상이 공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기원을 가지면서 관계론적 특성을 보인다면, 혹시 우리 문명의 원형은 훨씬 관계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라고도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노자를 현대 철학자라고 봐요. 사회의 어떤 필요가 사상을 호출하는 거잖아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노자의 사상에서 도움받을 내용과 참조할 만한 것이 있으니까 지금 노자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_「노자 사상의 해체주의적 면모는 어떻습니까?」에서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_「제1장 온갖 것들의 문」 번역문 전문

기억에 남는 문구

사유는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