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 <프롤로그: 허무를 직면하다> 중에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서슴없이 날이 밝고, 그냥 바람이 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 <봄날은 간다> 중에서
나도 패터슨처럼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 산책을 하고, 샤워를 한 뒤, 페이스북에 그날 밤에 들을 음악을 올리고, 그날 갈무리한 책과 영상을 보다 잠든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달걀을 삶는다. 타원형의 껍질 안에 액체가 곱게 담겨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정도로 달걀을 잘 익힐 수 있다. 오래도록 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오는 초조함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오는 허탈감도 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사라질 내 삶의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 <시간 속의 삶> 중에서
키케로는 노인도 퇴행하지 않거나 퇴행을 보완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늙으면 퇴행한다. 퇴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퇴행을 적극적으로 즐길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점에 노년 특유의 즐거움이 있다. 어떻게 퇴행을 즐길 수 있느냐고? 자신이 이미 이룬 것을 새삼 바라는 것이다. ― <노년을 변호하다> 중에서
지나친 여가는 인간을 공허하고, 무료하고, 빈둥거리고 낭비하게끔 만든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기 위하여> 중에서
어떻게 해야 일을 즐길 수 있나? 윌리엄 모리스는 주장한다.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활에 필요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들인 노력, 그리하여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말이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노동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기 위하여> 중에서
장자는 마침내 마음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 사람이 죽으면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나 모두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있냐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는데, 왜 죽었다고 새삼 슬퍼하느냐고. 이와 같은 장자의 위로에 공감하려면, 인생을 보다 큰 흐름의 일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은 뒤의 상태뿐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까지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중에서
어떤 멋진 정치적 이념이나 체제도 시간의 풍화를 견디기 어렵다. 사람들은 부패하고 게을러지며 제도는 낡고 삐걱거릴 것이다. 이 와중에 어떻게 정치체의 활력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구원의 약속이 없는 이 세속의 시간을 견딜 것인가. 이것이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정치 철학적 질문이다. ― <정치도 연애처럼> 중에서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중에서
연말연시가 되면 잡지사에서 연락이 오곤 한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독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다. 답장을 쓴다. '절망을 밀어낼 희망과 위로를 말할 자신이 없어 사양합니다. 너른 양해 바랍니다.' 희망이 없어도, 누구나 자기 삶의 제약과 한계를 안고 또 한 해를 살아가야 한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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