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여행법
김석현(김투몽)
5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수상한, 마케터의 유럽 마트 관찰기. 저자는 파리에서 생활하며 유럽 마트와 슈퍼마켓에서 얻을 수 있는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차곡차곡 기록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마케터의 여행법’은 다양한 마케팅 사례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남들과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감각과 기업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키우는 힘이다.
유럽은 ‘브랜드’라는 개념이 탄생한 곳이다. 럭셔리 브랜드의 본고장 파리, 각종 빈티지 브랜드로 가득한 런던,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도시 코펜하겐… 마케터라면 방문해야 하는 브랜드의 교본 같은 도시들이 유럽에 즐비하다. 유럽 기업들이 유서 깊은 브랜드를 관리하는 법,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키워내는 법, 브랜드를 매각하거나 외부 브랜드를 인수함으로써 기업 전체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가는 법 등을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마케터뿐 아니라 투자자 관점에서 풀어낸다. 투자감각이란 결국 투입되는 자본, 시간, 노력 대비 높은 성과를 이끌어내는 역량일 것이다. 작은 국가들로 이뤄진 유럽은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거대한 내수시장도 없고 노동력, 지하자원, 자본력 등도 풍부하지 않다. 유럽에서는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는 블록버스터급 브랜딩 대신 저비용 고효율의 창의적인 브랜딩 전략이 선호된다.
책속에서
유럽 마트 여행의 좋은 점은 또 있다. 앞선 소비 트렌드를 먼저 접함으로써 좋은 투자기회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렌드를 미리 볼 수 있으면 어떤 기업이 성장할지도 예측할 수 있다. 가령 유럽 마트에서 친환경 식품 소비가 증가하는 흐름을 관찰하고, 이러한 경향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 친환경 식품 원료를 생산하는 기업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마트의 식재료와 진열된 식품 브랜드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례로 유럽 마트의 간편식 코너에는 피자가 가장 많다. 이 사실을 남보다 앞서 관찰했기에 한국의 냉동피자 제조업체인 조흥을 한국에 있는 투자가들보다 먼저 눈여겨볼 수 있었다. 요컨대 마케터로서 익힌 소비 트렌드 파악 노하우는 투자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마침 여행 경비가 슬슬 고민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렇다고 경비를 모으기 위해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일을 늘렸다가 일에 매여 오히려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하게 되는 부작용을 일본에서 이미 겪어본 터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건 내가 바라는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마트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경비 정도는 충당할 만한 투자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니, 나로서는 최고 아닌가.
나의 본격적인 유럽 마트 탐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더 열심히 유럽 마트를 방문하고, 더 집중해서 먹거리와 마실거리, 소비자, 직원, 설비, 결제수단, 서비스, 광고 등 마트의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 결과를 적극적으로 투자에 반영했다.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다시 여행을 떠났다. 다시 말해 유럽 여행이 좋아서 투자를 하고, 투자를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유럽 여행이 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이곳 프랑스 파리에서 말이다.
- 프롤로그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여행했을 때였다. 코펜하겐 거리에는 특이하게도 이어폰보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월등히 많았다.
마케팅이라는 프레임이 없었다면 나의 관찰은 그저 ‘코펜하겐의 싸늘한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이어폰보다 헤드폰을 선호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마케터의 프레임 덕분에 자연스럽게 코펜하겐 사람들이 어떤 헤드폰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살폈다.
그들의 헤드폰에는 으레 덴마크의 대표 음향기기 브랜드인 뱅앤올룹슨Bang & Olufsen 로고가 새겨 있었다. 즉 나는 코펜하겐에서 뱅앤올룹슨의 인기를 ‘관찰’한 것이다. 인기의 원인으로 북유럽 특유의 세련된 디자인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투자라는 프레임도 지니고 있던 덕분에 내 관찰은 ‘뱅앤올룹슨에 과연 투자가치가 있을까?’라는 투자자의 호기심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뱅앤올룹슨이 금융위기 당시 도산 직전까지 몰렸고 주가가 급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리한 사업다각화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난 뱅앤올룹슨의 주가가 반등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존 에코, 애플 홈팟, 구글 홈 등 AI 기반의 스마트 스피커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음향기기 브랜드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2014년 애플이 약 3조 원을 들여 음향기기 업체인 비츠 일렉트로닉스Beats Electronics를 인수한 것과 2017년 삼성전자가 약 9조 원을 들여 하먼Harman을 인수한 것이 판단의 근거였다. 애플과 삼성전자 외에도 구글, 아마존, 텐센트, 알리바바 등 스마트 스피커 개발에 뛰어든 글로벌 IT 기업은 많은 반면, 인지도 높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음향기기 브랜드는 부족하다는 점 역시 뱅앤올룹슨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환경이라고 판단했다.
2009년 급락한 뱅앤올룹슨의 주가는 스마트 스피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2016년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상승 중이다. 마케팅이라는 프레임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코펜하겐 여행에서 헤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뱅앤올룹슨의 인기로 연결 짓지 못했을 것이며, 투자라는 프레임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뱅앤올룹슨의 인기를 관찰했다 하더라도 투자기회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여행지에서 투자기회를 발견하려면 우선 소비자 및 브랜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무엇보다 투자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쌓고 투자 자체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증권사에 가서 해외 투자가 가능한 계좌를 만들어야겠지만.
- 1부 ‘프레임 : 어디서든 나는 마케터!’
현대 미술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의 욕망에는 자본이 몰리는 법이므로 투자를 위해서는 동시대인들의 다양한 욕망을 알아야 한다. 예술가들은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들이어서 타인의 욕망을 읽는 능력이 탁월하며, 그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현대 미술관은 소비자 욕망을 파악하기에 최적의 공간인 셈이다.
유럽에는 좋은 현대 미술관이 워낙 많다. 또한 유럽의 현대 미술관 가운데는 새로운 문화적, 사회적 트렌드를 소개하는 기획 역량이 탁월한 곳이 많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파리의 까르띠에 재단 뮤지엄Fou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코펜하겐의 루이지애나 뮤지엄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등이 대표적이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와 테이트 모던의 전시는 현대 미술관에서 어떻게 투자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영국 아티스트인 데미안 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현대 미술 아티스트로, 죽음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1992년 테이트 모던과 기획한 ‘약국Pharmacy’이라는 전시에서는 알약을 활용한 회화와 설치미술 등을 통해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 그 해결방안으로 여겨지는 약에 대한 맹신과 모순 등을 표현해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뛰어난 투자가라면 데미안 허스트의 약국 시리즈가 표현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제약 및 바이오산업에 대한 투자가치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약에 대한 맹신은 곧 제약 업체의 거대한 수요와 높은 마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1부 ‘공간: 마케터가 현대 미술관에 가야 하는 이유’
삐꺄와 막스앤스펜서가 프랑스에서 경쟁업체들을 제치고 간편식 시장의 선두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일단 제품 경쟁력이 월등하다. 일반적인 유통업체와 달리 삐꺄와 막스앤스펜서는 급속냉동 기술, 가스치환 기술 등 편의성을 높이고 신선도를 오래 유지하는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R&D에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한다. 생산 자체는 OEM 형태로 이뤄지지만, 간편식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을 직접 확보해 협력업체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또한 간편식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식자재들의 원산지를 특정 지역으로 제한하고, 포장 및 용기 디자인에도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 과정에서 음식의 맛을 놓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노력이 제품 경쟁력이 되었다.
둘째, 두 기업의 성공은 무엇보다 소비자와의 높은 접근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소비재나 그렇겠지만 간편식은 소비자와의 접근성이 더욱더 중요하다. 이는 소비자들이 간편식을 구매하는 패턴 때문인데, 많은 사람들이 퇴근길에 그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간편식을 사서 집으로 간다. 그러므로 주거지역과 가까운 지하철역 인근에 매장이 있어야 한다. 두 기업이 지속적으로 더 작은 매장, 주거지역과 더 가까운 매장을 늘리는 데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점점 가치가 하락하는 대형마트와 달리 삐꺄와 막스앤스펜서 같은 간편식 매장의 가치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간편식 수요가 증가하는 수준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간편식이라는 특정 제품 카테고리가 유통업태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산업을 변화시킬 만큼 영향력 있는 제품을 초기에 알아보는 것이 곧 시장을 보는 안목이다. 아이폰의 진가를 먼저 알아본 사람들이 애플, 삼성전자 및 관련 부품 기업들에 투자해둔 것처럼 말이다.
- 2부 ‘삐꺄, 막스앤스펜서: 경쟁의 공식을 바꿔놓은 간편식’
많은 사람들이 이케아를 그저 가구회사로만 인식하는 듯하다. 아케아는 가구회사인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식품 유통업체다. 창업주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는 배고픈 고객에게는 물건 팔기가 어렵다며 1956년 이케아의 첫 번째 매장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소비자들로 하여금 든든히 배를 채우고 쇼핑하거나 쇼핑을 다 마치고 레스토랑에 들러 식사하고 돌아갈 수 있게끔 한 이케아의 배려이자, 추가 매출을 올리고자 하는 사업전략이었다.
예상대로 이케아 레스토랑은 큰 인기를 끌어 음식뿐 아니라 식료품도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체 방문객 중 약 30%가 가구 구매가 아닌 식사 또는 식료품 구매만을 위해 매장을 찾을 정도로 이케아의 식품 유통사업은 크게 성장했다.
식품 유통업체로서 이케아의 가장 큰 경쟁력은 가구와 마찬가지로 먹거리 판매 역시 라이프스타일의 일환으로 접근한다는 데 있다. 물론 이케아가 식품 유통사업에 라이프스타일로 접근하는 유일한 업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케아의 식료품 사업이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가구사업을 라이프스타일로 제안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역량을 식품사업에 효과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2부 ‘이케아: 가구도 먹거리도 라이프스타일로 판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은 산업의 전 영역에 나타나는 주요 이슈다. 그중 화장품 산업은 피부에 직접 사용하는 터라 친환경 원료에 대한 수요가 식품 산업 못지않게 크다. 마침 유럽은 지속가능성 이슈에 가장 민감한 사회여서 나는 운 좋게 이런 변화를 먼저 체감할 수 있었다. 몇 년간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친환경 식품 및 화장품 원료를 공급하는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스터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주목하게 된 기업이 나투렉스Naturex다.
프랑스 남부 도시 아비뇽과 모로코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나투렉스는 식물에서 추출한 성분들로 친환경 식품, 제약, 화장품 원료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프랑스 남부 지역과 모로코는 원래 아로마 오일의 원산지로 유명한데 지역의 전통적인 산업을 기업화하여 부가가치를 높인 것이다. 나투렉스는 1992년에 창업해 1996년 파리 증시에 상장되었으며, 친환경 원료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기업가치도, 밸류에이션valuation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투자자의 관점에서 보면 친환경 원료라는 차별화된 사업영역에서 우월한 기술과 생산시설을 확보했다는 점, 화장품 영역에서 경쟁우위로 이어질 수 있는 원산지 효과, 시가총액 1조 원에 불과한 기업 규모는 나투렉스가 여전히 투자가치 높은 기업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된다.
그런데 내가 원고 초안을 써두고 수정하는 사이 나투렉스가 세계1위 향료 기업인 스위스의 지보단Givaudan에 인수되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물론 주가도 급등했다. 지보단의 자회사가 된 만큼 더 이상 나투렉스에 투자할 수는 없게 됐지만 유럽, 미국, 아시아에는 경쟁력 있는 친환경 원료 기업들이 다수 있는 만큼 꾸준히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 3부 ‘퓨어써클: 코카콜라는 왜 원료 브랜딩을 시작했을까?’
때로는 한 사회에 다른 사회의 문화가 유입되면 새로운 컬처 코드가 형성된다. 일본 문화가 유럽에서 고급문화로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컬처 코드로 자리 잡은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 새로운 컬처 코드가 생겨나면 기업들은 이를 마케팅에 활용한다. 가령 프랑스의 럭셔리 차 브랜드인 마리아주 프레르Mariage Freres에서는 매해 봄 벚꽃 한정판 차를 출시한다. 유기농 녹차 베이스에 벚꽃을 블렌딩한 제품으로, 차의 향 못지않게 벚꽃을 형상화한 용기와 포장 디자인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벚꽃이 프랑스에서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봄에만 피는 한시성이 한정판에 적합하며, 무리 지어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이 인스타그램 등 이미지 기반 소셜미디어에 잘 어울린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원적인 요인은 프랑스의 재패니메이션 키즈가 주력 소비층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패니메이션 키즈란 어린 시절 일본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현재 북미와 유럽의 20~30대 중 상당수가 재패니메이션 키즈에 해당된다.
- 3부 ‘마리아주 프레르: 앞서가는 브랜드 매니저는 문화를 읽는다’
여행을 하면서 새삼 느낀 사실은 유럽이 투자감각이 뛰어난 사회라는 것이다. 투자감각이란 결국 투입되는 자본, 시간, 노력 대비 높은 성과를 이끌어내는 역량일 것이다. 작은 국가들로 이뤄진 유럽은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거대한 내수시장도 없고 노동력, 지하자원, 자본력 등도 풍부하지 않다. 그런 터라 보유하고 있는 것들을 효율적으로 쓰는 과정에서 투자감각이 발달한 것 아닐까?
이러한 투자감각은 유럽 기업들의 브랜딩 방식에도 투영되어 있다. 미국처럼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는 블록버스터급 브랜딩 대신 저비용 고효율의 창의적인 브랜딩 전략이 선호된다. 한국 역시 가진 것이 많은 나라는 아닌 만큼 유럽을 여행하면서 배운 그들 특유의 투자감각은 한국의 마케터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에필로그 ‘마케터에게, 유럽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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