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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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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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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비와 관련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다. 언젠가 중국 옌지 들판에서 한 할아버지가 아기를 업고 빗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벌거벗은 노인과 아기의 몸은 잘 먹지 못해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노인은 비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더이상 젖을 옷이 없기에 비를 피해 뛰어갈 필요도 없었다. 어린 자연을 업고 걸어가는 늙은 자연, 이상하게도 그 처연한 모습에서 어떤 평화가 느껴졌다.

_ ‘비의 방’ 중에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들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_ ‘엎드릴 수밖에 없다’ 중에서

그날 저녁 산책에서 돌아와 아이들에게 제법 비장하게 말해두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양지바른 언덕이나 강가에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달라고. 죽어서도 차가운 대리석 묘비보다는 나무의자가 따뜻할 것 같다고. 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가거나 사랑을 나누어도 좋겠다고. 아니면 오늘처럼 아무도 앉지 않고, 종일 흰 눈만 소복하게 쌓여도 좋으리라.

_ ‘묘비 대신 벤치를’ 중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에게 포착된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는 내 뒷모습에서 때로는 쓸쓸함을, 때로는 차가움을, 때로는 경쾌함을 읽어냈으리라.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_ ‘뒷모습을 가졌다는 것’ 중에서

원래 아름다운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 발견해낸 자가 느낀 경이로움에 의해서만 만물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만일 봄이 아닌 다른 계절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과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을 것 같다.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만물이 하나둘 피어나는 봄날의 모습은 다른 계절에 느끼는 자연의 변화와는 분명히 다르고 특별하다. 살아 돌아온 모든 존재들에게 한없는 찬탄과 축복을 보내고 싶은 계절. 연록빛 새순과 꽃망울들을 보면 저 여리고 고운 빛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지 궁금해지는 계절.

_ ‘봄을 봄’ 중에서

북경의 오래된 골목에서 한 벽을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벽 속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눈을 부릅뜬 커다란 원숭이 한 마리. 물론 수도관에서 쏟아진 흙탕물이 바람에 휩쓸리며 남긴 형상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벽을 뚫고 들어가고 싶은 것은 꽤 보편적인 욕망인 듯하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벽을 만날 때마다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그 집의 내부를 상상의 열쇠로 열고 들어간다. 우연히 벽에 남겨진 시간의 흔적, 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없이 펼쳐진다.

_ ‘벽은 말한다’ 중에서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공통점만으로도 그들은 쉽게 길 위의 친구가 된다. 기다려야 할 시간이 길수록, 터미널이 작고 사람이 많지 않을수록 더 쉽게 친밀해진다. 그들은 자신이 찾아가는 존재, 또는 기다리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마치 서로 다른 전류가 한 지점에 모여드는 전극처럼, 그 순간 터미널에도 마음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터미널은 단순한 종점이 아니다. 터미널terminal의 어원인 ‘term’에는 ‘끝’이라는 뜻과 함께 ‘경계’라는 뜻도 들어 있다. 누군가에게는 종착지인 곳이 누군가에게는 출발점이기도 한 곳. 또 누군가에게는 반환점이거나 경유지이기도 한 곳. 수많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스쳐가는 곳이지만, 낡고 때묻은 의자에 잠시 앉아 삶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몇 사람처럼.

_ ‘터미널이라는 곳’ 중에서

이제 보니 내가 써온 시들 역시 그 울음소리를 닮아 있다. 내 시뿐 아니라 문학이란 그런 삐걱거림 또는 파닥거림의 기록이 아니던가. 시는 근원적으로 무애無碍한 비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빚어지는 공간은 오히려 비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생존의 울음소리는 피해야 할 소리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귀기울여야 할 소리가 아닐까. 내 귀를 막고 있는 밀랍 조각을 들어내고 내 몸을 단단하게 묶고 있는 사슬을 거두어내면서라도. 글쎄, 석모도 갈매기로 환생한 사이렌들이 이런 내 생각을 알게 된다면, 다음 뱃길에선 울음소리 대신 막막한 침묵으로 나를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_ ‘두 조나단 사이에서’ 중에서

기억에 남는 문구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