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라일락 전세
라일락에 세 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살림이라곤 바람에 뒤젖히며 열리는 창문들
비 오는 날이면 훌쩍거리던 푸른 천장들
골목으로 들어온 햇살이 공중의 옆구리에 창을 내면
새는 긴 가지를 물어 구름과 집 사이에 걸었다
그렇게 새와 바람이 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따라가면 하늘이 어느덧 가까웠다
봄날 라일락꽃이 방 안에 돋으면
나는 꽃에 밀려 자꾸만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인은 봄마다 방값을 올려달랬으나
꽃 피면 올라왔다가 꽃 지면 내려갔다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 나는 라일락 꼭대기에 앉아
골목과 지붕을 지나는 고양이나 겸연쩍게 헤아렸다
저물녘 멀리 마을버스가 들어오고 이웃들이
약국 앞 세탁소 앞 수선집 앞에서 내려 오순도순
모두 라일락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기뻤다
그때 밤하늘은 여전히 신생대였고
그 별자리에 세 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골목 안에 라일락이 있었는지
나무 안에 우리가 살았는지 가물거리는
그림자들
누구나 빈집 한 채 가지고 산다
빈집에 들어가 누워 나오지 않으면
그때 그것을 죽었다고 쓴다
저 집을 빠져나간 산 육체는 없다
아니 살아서는 절대 못 나가는 집이다
토막 나면 토막 난 집에 담기고
부서지면 부서진 집에 담긴다
끔찍한 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 집을 빠져나가는 길은 단 두 가지
눈물이 되거나 핏물이 되는 것
네가 그렇게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면
이제는 차라리 슬픔을 응원하라
흔들어봐야 죽은 닭대가리 같은 믿음 아닌가
한 개비 담배만도 못한 안심 아닌가
재가 되거나 연기가 되거나
이제는 차라리 증발을 자초하라
한때 지조 없는 철새길 바랐으나
비둘기처럼 멀리 날지 않는 그림자들
잡히지도 않는, 한 걸음 나가면
한 걸음 들어오는 움직이는 빈집
모든 바깥이 끌려 들어가는
캄캄한 안쪽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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