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기자의 어느 금요일
최은별
"첫눈에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안에 박혀, 나는 평생 이 순간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살아갈 거란 걸.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든 문득문득 이 순간이 떠올라 나를 무너뜨리거나 지탱시켜 줄 거란 걸. 내가 얼마를 살아도 이보다 더 거대하고 찬란하고 분명한 감정은 가질 수 없을 거란 걸. 나는 다 알았다."
- 운명을 기다리는 여자, 고요.
"사랑이 뭔지 아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 그녀를 알지 못했을 때는.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잘 알겠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별과 눈송이와 빗방울을 다 셀 수 없다는 사실보다, 내가 나라는 사실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더 명징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그녀의 운명이 되고 싶은 남자, 현우.
[문예연구]2017년 겨울호에 신인문학상 시 부문으로 당선된 저자 최은별의 첫 장편소설이다.
시인다운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장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 소설은 비단 사랑뿐 아니라 꿈, 청춘, 낭만, 운명 등에 대한 다양한 고찰을 드러내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거기에다 두 주인공이 번갈아 가며 일인칭 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성이 이채롭다. 저자만의 담백하고 서정적인 문체가 15년 전 겪은 한순간으로 인해 운명론자가 된 여 주인공과 2년 전 최악의 이별을 경험한 후 연애에 회의감을 갖게 된 남 주인공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도 압도적인 기량을 보인다. 더욱이 기차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일상의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역력히 증명하는 부분이다.
신인답지 않은 유려한 문체로 극을 이끌어 가는 작가를 통해 독자들은 로맨스 소설이 가지는 품격을 실감할 수 있다.
책속에서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범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껏 모든 연애 상대에게 그랬다. 범람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점차 침윤되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연애 감정이 아닌가? 사귀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커져 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사귄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그녀는 내게 “넌 날 쳐다보지 않네. 늘 앞만 보고 있어서 화가 나.”라고 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 여겼고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꼭 서로 마주봐야만 하는가? 각자 앞을 보고, 나는 내가 본 별을 이야기하고 그녀는 그녀가 본 구름을 이야기하면 되지 않는가. 나와 그녀 사이엔 아무 문제가 없건만 그녀는 자꾸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사귄 지 다섯 달이 되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날 나무라지도 않았다. 내게 사랑이란 별다른 게 아님을, 단조롭고 건조한 내 연애 방식을 마침내 이해한 듯했다. 그리하여 사귄 지 반년이 된 지금에 와선 걱정할 것 없는 평탄한 날들이 이어졌다.
비처럼 내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공과대학 수업을 듣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중, 벚나무 아래 벤치에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보였다. 몇 발자국 옆에서 인사를 건넬까 말까 고민하는데 수선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진호 씨 정말 괜찮다. 직업도 멋지고 너한테 잘하고.”
“너 그 남자 꽉 잡아. 대학원 졸업하고 결혼하면 딱 좋을 것 같아.”
“진호 씨 만난 지 한 달 됐다고 했나?”
그녀의 친구들이 야단을 부리는 동안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내가 듣고 있는 대화의 내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참, 현우는 정리했어?”
불쑥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특유의 찬찬한 말씨로 대답했다.
“아직 못했어.”
“그래 뭐, 세컨드로 둬도 괜찮지. 풋풋하고 잘생겼잖아.”
“그런 생각인 건 아냐. 말하려고 했는데, 현우 눈을 보고 있으면 상처받을까 봐 말이 안 나오더라고.”
“어휴, 다 네가 착해서 그래.”
붉은빛으로 염색한 그녀의 친구가 그녀의 어깨를 몇 번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자,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카페나 가자. 내가 쏜다!” 하며 한쪽 팔로 그녀를, 다른 팔로는 다른 친구를 잡고 끌어당겼다.
첫눈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큰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내게 왔다는 것, 미루거나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동경이라면 사랑보다 큰 동경이고, 환상이라면 사랑보다 큰 환상일 뿐.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건 무엇을 의미하건 내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마음이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절실하고 온전한 감정이었다.
버거웠다, 수많은 날들이. 홀로 새벽을 밟고 서 있는, 여린 별 하나쯤 떠 있어도 좋은데 그마저도 없는, 세상과 격절된 까마득한 느낌에 자주 휩싸였다. 늘 갑갑하고 갈증이 났으며 위태로웠다. 이 거대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어서, 내가 다 끌어안고 감추고 있어야 해서.
비밀을 말하여 상처받은 이후로 나는 더욱 비밀이 많아졌다. 정말로 말하고 싶은 사람에겐 더 말할 수 없었다. 두려워서, 그들조차 내 마음을 멸시할까 봐, 나를 조금도 이해해 주지 못할까 봐, 그래서 내가 무너져 버릴까 봐……. 그렇다고 아예 친하지 않은 사람에겐 말할 이유가 없었으며 상대 역시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내겐 ‘적당한’ 사이가 필요했다. 일단 내 이야기를 할 마음이 드는 사이.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성가셔하지 않는 사이. 혹여 내 흉금이 모멸당하더라도 비교적 적게 상처받을 수 있는 사이. 나를 무너뜨릴 순 없는 사이.
띠링.
「고요 씨, 늦은 시간에 메시지 보내서 미안해요. 너무 궁금한 게 생겨서.」
「괜찮아요.」
「그, 어제 고요 씨가 한 말 중에 말이에요…….」
「음, 그건 말이죠…….」
「내가 너무 많은 걸 묻죠?」
「와,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던 거예요?」
「미안해요. 그리고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요. 말할 수 있게 해 줘서요.」
……그리고 지금, 그런 사이가 생긴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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