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한순
도시에서 나흘, 시골에서 사흘
시간과 환경을 견디며 나를 되찾는
본질 회복 에세이
“자신의 허약함을 보는 일은 그리 기쁘지는 않지만 감사한 일이다.”
책속에서
시골 생활을 하면서 문득문득 만나게 되는 이 자연스러움(?)에 몸이 움츠러들곤 한다. 그런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들 앞에서 그저 나도 그러한 듯 견디며 지나가야 한다. 벽 틈을 파고드는 바늘귀 황소바람 앞에서도,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는 고라니 앞에서도, 무슨 업인지 온몸을 땅에 대고 구불구불 기며 살아야 하는 뱀 앞에서도. 아직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조들의 이야기와 경험으로 미루어 모두 존재의 이유가 분명히 있기에, 그들은 그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굴참나무 도토리는 종자를 떨어뜨리고, 내가 번민에 싸인 시간에도 바람은 나무를 흔들어 깨운다.
초록이 마음껏 팔을 뻗은 산과 들을 달리며 내가 자란 옛집의 풍경을 떠올려보는 일은 흥미롭다. 그중 어느 장면들은 나를 이해하는 훌륭한 단초가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나를 알아가는 시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나’와 ‘나’ 사이가 좋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의해 많은 지배를 받고 사는 것 같지만, 주변을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프리즘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듯하다. 그러니 문제는 나 자신이고, 나를 알기 위해서는 자라온 환경을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얼마나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이 달마같이 온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얼마나 썩고, 남몰래 울어야 마리아처럼 순종할 수 있을까? 벗은 얼마나 많은 마음을 이 돌조각과 함께 내려놓았을까? 돌조각을 닦던 마음이 울컥했다. 선머슴처럼 떠돌던 마음이 이제 와 새삼 여성의 자리에서 움찔했다. 냉장고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여성에게, 한 끼 밥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살림 선배에게, 자신 몫의 슬픔은 이미 정기예금에 맡겨버린 예쁜 후배 여성들에게 느끼던 선망의 마음은 이런 여성성이었을까? 우주, 땅, 밭, 돌, 이들이 가진 여성성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아우르고 독려하고 참고 키우고. 이제는 내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나’를 찾아보겠다고 나선 길에 오지랖이 더 넓어져버렸다. 여성이지만 다시 더 큰 여성을 선망하는 마음. 늘 가까이에 있었던 오빠나 아버지의 흉내를 내며 살아왔지만, 내 속에서 여성이 다시 노크를 하고 있었다. 녹색의 에너지가 하늘을 향해 거칠 것 없이 뻗어가고, 대지가 곪고 썩는 여름 한복판이다. 이 싱싱하고 푹푹 썩는 무더운 여름이 유난히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 와 새삼.
봄, 여름, 가을, 겨울 색깔이 다른 교과서가 시간에 따라 펼쳐지는 곳이 자연이다. 매년 친절하게 말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나이만큼 반복해서 가르쳐준다. 식물이 떨어뜨린 씨앗 하나가 생명의 움을 틔우기까지, 두더지는 포슬포슬하게 땅을 일궈놓고, 빗방울은 대지의 목마름을 적셔놓고, 또 낙엽은 이불을 덮어 온기를 지켜준다.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하지만, 이런 무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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