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비록 내 굴복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전입 첫날의 그 작은 충돌은 엄석대에게 꽤 강한 인상과 더불어 어떤 경계심을 일으켰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첫날의 승리가 못 미더웠던지 다음 날 한 번 더 그걸 확인하려 들었다. 역시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내가 바쁘게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앞줄에 앉은 아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설령 네가 옳더라도…… 나는 반 아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석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네가 반드시 그러리라 믿고 있을 것처럼…… 아이들의 그 지지란 것이 실상은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거짓된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야. 나는 어쨌든…….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석대의 힘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지금껏 흐트러짐 없이 잘돼 나가던 우리 반을……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흩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지.”
너무도 허망하게 끝난 싸움이고 또한 그만큼 어이없이 시작된 굴종이었지만, 그 굴종의 열매는 달았다. 오래고 끈질긴 반항 끝에 이루어진 굴종의 열매라 특히 더 달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그의 질서 안으로 편입된 게 확인되면서 석대의 은혜는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복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것도 한 학급의 우등생인 녀석들이……. 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모두 교단 위에 손 들고 꿇어앉아 다시 한번 스스로를 반성하도록.”
“놈은 무언가 그들에게 더러운 속임수를 쓰고 있어. 그들은 자기들이 성공해서 받게 될 것보다 더 큰 대가를 놈이 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았어…….”
“사람은 현란하게 꾸며진 말을 벗기면 모두 저마다의 소를 좇고 있을 뿐이에요. ‘뱀눈’은 권력의 소를 좇고, ‘달무리’는 그 ‘뱀눈’이 나누어주는 부귀의 소를 좇는 식으로……. 그런데 제가 좇는 소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풍요와 안락의 소예요. 그리고 ‘뱀눈’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바로 그것들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이제 ‘뱀눈’ 아닌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 하더라도 그가 그런 것들을 줄 수 있다면 또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더구나 그의 부족은 강성하고, 그의 가축 떼는 들판을 덮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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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엄석대 / 이문열 소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원작 소설 / 결말포함 / 북튜버 사월이네 북리뷰
오늘은 이문열 작가의 1987년 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소개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시골 국민학교를 배경으로 같은 반 아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아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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