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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불구의 삶, 사랑의 말 -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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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의 삶, 사랑의 말

양효실

삶은 고통스러운데 왜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하는가. 인생이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예술가는 왜 이상하고 그들의 말은 왜 우리 귀에 잘 안 들리는가, 상처는 왜 아름다운가, 왜 문제가 곧 가능성이 되는가, 왜 고통의 전시가 사람을 성장시키는가……. 저자는 이 두 계열의 물음이 다르지 않은 것임을, 모두가 예민한 존재들의 언어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은 온몸으로 불행과 상처를 받아 안으면서도 막연하게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을 언어로 만들어 그것을 전시하고 노래하고 즐기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만큼이나 약한 이들을 학대할 뿐 여전히 화해하거나 사랑할 줄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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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승리와 화해, 엔딩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성장은 나를 죽일 것처럼 가로막고 누르던 상처를 덧나게 하는 미적 반복의 행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단언컨대 아이들은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할 뿐이고, 어른들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일 뿐이다. 그들을 어떻게 우리와 함께 살아갈 동등한 타자로 간주할지는 결국 우리의 역량에 달렸다.

환상 없이 현실을 끌어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용기’는 주체적인 자아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힘, 그러므로 그냥 발휘하기만 하면 되는 내적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용기는 그런 주체성이나 능력을 잃는 힘, 네게 함입되기 위해 내가 최소화되는 무력감을 뜻한다. 흔한 말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생존법 같은 것이다. 이 용기는 더 잃을 게 없기에 어디든 가는 사람들의 긍정법을 가리킨다.

나는 시인을 기성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세계관이나 감정이 아닌, 낯설고 불행하고 슬픈 감정들을 보존하고 발굴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싶다. 시인은 단지 시를 잘 짓는 직업인이나 전문가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앞서 말한 노숙자, 미친 사람, 범죄자, 지금 죽어 가는 자의 상태를 언어화하려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를 거부할 것이고 기꺼이 나쁜 쪽에 설 것이고 사회와 언어와 상식의 외피를 벗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삶이라는 낫지 않는 병을 긍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약하고 유약하고 예민한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로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려는 이 긍정과 능동의 힘을 통해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다.

폭력을 없애기 위해 더 많고 더 나은 아버지를 세우는 것, 법을 더 공고히 하는 것은 근대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실패했다. 그렇다면 남자들에게 남은 길은 ‘여자 되기’다. ‘여자 되기’는 추락이다. 더 철저히 추락하고 비천해지지 않으면 폭력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이름들 때문에 상처 입는다. 내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가 아니고 내 어머니가 좋은 어머니가 아니며, 내 친구가 좋은 친구가 아니고 내 애인이 좋은 애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들이 나를 물건처럼, 짐승처럼, 시체처럼 대했다는 것이, 나를 버러지 취급했다는 것이 우리가 상처받는 이유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그때 얻은 상처가 나를 나쁜 이름들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기회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은 무의미하다. 왜 사는가를 묻지만 어떤 대답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허무하다. 그럼에도 계속 살기를 욕망하는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진리, 도덕, 믿음은 오직 인간을 약화시키고 삶을 부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러므로 삶을 긍정하는 자는 무엇보다 도덕을 파괴해야 하고 신을 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예술이, 시가 필요 없다. 반대로 우리는 이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억압하지 않기 위해 감각적 언어의 더러움을 전유해야 한다. 내가 전체가 아님을, 나는 지금 새고 흐르는 구멍임을 알려주는 이들이 없다면 더러운 이 몸, 비천한 생을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의사와 선생, 정치인에게 농락당하고 약속과 희망에 모욕당하는 이 몸의 작란(作亂)을 누가 정당화하겠는가?

우리는 마츠코를 통해 사랑이란 인정받고 지지받고 칭송받으려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던지고 계속 긍정하는 몸짓 외에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을, 설사 사랑이 혐오스러워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는 자는 속는 자이고 다시 속지 않기 위해 남을 속이는 자이다. 아이러니의 탐미주의와 웃음이 저항인 이유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 본질로 간주된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웃는 자들은 자연, 본질과 같은 것을 미적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그들은 자연과 본질과 사실이 지배하는 현실을 웃음으로 횡단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고 기적을 보는 사람이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죽었던 몸을 일으킨다. 사랑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잠들 수 있게 한다. 사랑은 네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 외에, 네 몸에 도달하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말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표현하는 사람에 의해 사후적으로 출현한다. 세상 자체가 아름다운 게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 악에서 선을 보고 추에서 미를 보는 사람에 의해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것이다.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말하기가 먼저다. 행위는 말하기에 의해, 시에 의해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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