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경영자와 마케터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은 그래프의 성장곡선이라는 말이 있다.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실제 어느 정도 성장했다가 조금 하락세를 보인 후 다시 올라가는 회사들은 많아도, LG생활건강(이하, 엘지생건)처럼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꾸준히 성장해온 회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들다. 기울기 차이는 있을지언정 엘지생건의 성장 그래프는 마이너스 없이 계속 플러스 행진을 이어왔다. 그것이 차석용 부회장 부임 이후 일관되게 나타난 결과이기에, 그가 만들어낸 반전의 원동력을 더욱 궁금해하게 된다.
운 좋게 2007년부터 6년간 엘지생건의 사외이사를 하며 성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이사회가 있을 때마다 기록적인 성과를 보여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경영학자의 눈으로 봐도 그런 성과를 가능케 한 그‘ 한 방’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어코는 차석용 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회사가 참 잘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잘하시는지 안 보이네요.”
그랬더니 웃으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세요”라고 했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냐고 물었더니 “저희는 강펀치나 KO펀치가 없어요. 그러니까 멋있는 광고, 히트, 화제가 되는 건 없고 오히려 잽으로 경영해요”라는 것이었다.
“그 잽이 뭔데요?”
“그건 저도 몰라요. 하하.”
그 잽이란 게 뭘까?
- 프롤로그 : 무엇이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가?
엘지생건식 체질개선의 뿌리가 ‘소비자 중심’이라면, 이를 지속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은 ‘스피드’다. 다른 회사에 다니다 입사한 사람들이 엘지생건에서 가장 먼저 실감하는 것도 다름 아닌 휘몰아치는 업무속도다. “이렇게 빠른 회사는 처음 본다”는 말을 누구나 한다.
그만큼 엘지생건의 의사결정은 빠르다. 차 부회장도 의사결정을 빨리 해주자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물론 빠르다고 다 정답은 아니지만, 의사결정을 미루고 고민만 하는 것보다는 실패를 하더라도 빨리 결정해서 빨리 실패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게 차 부회장의 지론이다.
웬만한 사안은 보고하는 그 자리에서 결론이 난다. 당장 결정하기에 정보가 부족하다 싶으면 즉석에서 컨퍼런스 콜을 한다. 곧바로 관련 부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고 의견을 구한 다음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하고, 대부분 결론을 내려버린다.
엘지생건의 구성원들이 꼽는 자신들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적시성’이며, 그 기반이 이처럼 빠른 의사결정이다. 얼마나 타이밍을 잘 맞추느냐가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데, 의사결정이 바로바로 이루어지는 덕분에 액션이 경쟁사보다 한발 빠를 수 있다.
- 1장 ‘체질개선과 혁신 : 이노베이션이 아니라 리노베이션이다’
축구에서 이기려면 ‘90분 안에’ 골을 넣어야 한다. 워라밸은 골은 넣지 않고 짧게 일하라는 것도 아니고, 90분을 넘겨서 넣으라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업무를 처리하고 쉴 때 쉬라는 것이다. 이것이 차 부회장이 생각하는 워라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성과를 내라는 것이니 하루가 얼마나 치밀하고 치열하겠나.
최근 법제화된 주52시간 근무제를 지키느라 많은 회사들이 일괄적으로 컴퓨터를 끄거나 출퇴근 시간을 체크하는 등 대책을 내고 있는데, 엘지생건은 10년 이상 쌓였던 문화를 이어서 주52시간 근무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분위기다.
그 밖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동시휴가를 실시해 전사가 쉬게 하고, 영업직에 스마트 스테이션을 실시하는 등 워라밸에 대해 오래전부터 신경 써오고 있다. 가족과 더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도 있겠지만, 리프레시refresh 시간이 충분해야 더 생산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리프레시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 업무는 덜어주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의사결정이 빠르고 페이퍼 작업이 적으니 회사의 평소 메시지와도 자연스럽게 부합한다.
- 1장 ‘체질개선과 혁신 : 이노베이션이 아니라 리노베이션이다’
엘지생건도 코카콜라를 인수하고 월말 매출쏠림을 근절하자 첫 분기에 전년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하지만 차 부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매출은 영업활동의 결과이지, 매출이 영업활동은 아니다”라며 매출목표 달성에 연연하지 않았다.
영업은 흔히 ‘DDMP’라고 한다. 입점(distribution), 진열(display), 판촉(merchandising), 가격(pricing)이 그것이다. 즉 매출결과가 나오게끔 하기 위해 매장에 우리 제품이 들어가 있는지, 진열 상태는 괜찮은지, 먼지가 쌓여 있지는 않은지, 좋은 위치에 놓여 있는지 점검하고 안 팔리는 제품을 빼내고 팔리는 제품을 집어넣는다. 아울러 정상적이고 적절한 가격이 책정되었는지 확인한다. 이런 일련의 활동이 영업의 일이라 여겨 관리지표로 삼고 평가한다.
차 부회장은 매출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질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매출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면 “왜 그런가? 진열이 잘못됐는가, 머천다이징은 괜찮은가?” 등 원인을 점검하고 지적하지, 매출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를 질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시 영업을 총괄했던 임원에게 ‘매출하지 말라’는 시그널이 몇 개월간 갔을 정도였다고 하니 차 부회장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했는지 알 수 있다. 대신 그가 요구한 것은 시스템을 제대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직 전체가 CEO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영업에서는 ‘목표달성이 인격이다’라는 말이 금언처럼 떠돌 정도라, CEO가 겉으로는 저렇게 말해도 속으로 얼마나 불안할까 걱정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 요구하지는 않아도 매출을 어떻게든 달성하는 게 영업담당 임원이나 부문장의 도리이고 ‘해드리면 좋아할 것’이라 짐작해 허락받지 않고 저질러본 사람도 있었다. 결과는 아웃, 보직발령이었다. 연말 인사시즌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통보되었다. 특정 행위를 근절하는 데 이보다 강력한 시그널은 없을 것이다.
- 2장 ‘업의 본질에 따른 포트폴리오 전략 : 코카콜라를 인수하다’
사드 사태가 터지면서 면세점과 방문판매로 제품을 구매하는 루트가 끊겼다. 중국에서 후 브랜드를 구매하던 실수요자에게 갈 길도 백화점 외에는 막혀버린 셈이다.
차 부회장의 실용주의는 기본적으로 ‘수요가 있는 곳에는 공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드 사태로 후 브랜드의 수요자들에게 도달하는 채널이 끊겼다면, 해법은 그것을 어떻게 다시 잇느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면세점 외의 다른 채널 말이다.
차 부회장은 유통채널을 직접 점검하자는 기조였다. 당장은 사드 사태로 유통이 문제가 됐지만, 사드 이후에도 이런 문제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다. 그러니 이참에 면세점을 통해 제품을 받아서 판매하던 사람들과 직접 연결해보기로 했다. 방법은 하나, 발로 뛰는 것뿐이었다. 중국법인의 직원들이 홍콩으로, 선전으로, 위하이로 뛰며 후 브랜드를 취급했던 판매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녀 다시 거래선을 엮어냈다.
- 3장 ‘선택과 집중의 럭셔리 추구 : 중국시장부터 공략하다’
마케팅 환경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매체의 다양성이다. 매체의 영향력이 계속 옮겨 다니고 있기 때문에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미디어 믹스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빠르게 캐치해 어떻게 할지 방향을 잡는 것은 순전히 감각의 문제다.
특히 리더의 감각이 중요하다. 현장 실무자가 아무리 새로운 흐름을 간파해 마케팅 제안을 해도 의사결정자가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차 부회장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시도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찾아다닌다.
차 부회장의 퇴근시간은 항상 오후 4시다. 퇴근 후에는 회사 사람은 물론 업계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그 흔한 친목모임도 없다. 대신 어디든 돌아다닌다. 매장이든 백화점이든 길거리든, 소비자가 있고 아이디어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화장품은 물론이고 패션 아이템도 유심히 본다.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나리타공항에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한다.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말 그대로 면세점만 ‘찍고’ 돌아오는 것이다. 사람들의 취향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고서로 받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실감하려는 노력이다.
- 4장 ‘고심하는 마케팅 전략 : 지속가능한 성장을 꾀하다’
엘지생건을 조사하고 인터뷰하면서 받은 전체적인 느낌은 일단 ‘일하는 태도가 전문가 조직’이라는 것이다. 조직 전체적으로 맡은 일을 매우 잘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단단히 잡혀 있는 회사다.
동시에 지금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적잖이 읽힌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든 엘지생건에서도 조직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면서도 조직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일하는 방식에 대한 자부심이나 성과에 대한 자부심만은 아니다.
이들의 독특한 자부심을 설명해주는 단어가 바로 ‘레거시legacy’로, 말 그대로 물려받는 유산이나 족적을 말한다. 엘지생건은 자주 100년 후, 200년 후를 말한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100년 후 200년 후에도 물려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들 당시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고 엄청난 희생도 따랐겠지만, 덕분에 인류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얻었다. 말하자면 이런 레거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쁜 레거시를 만들면 오히려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성과뿐 아니라 지금의 문화가 후배들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또 물려줄 만한 것이어야 한다. 차 부회장이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숱하게 하는 고민이 이것이다.
- 6장 ‘리더십과 레거시 : 방향을 정하고 성과를 만들고 조직을 키운다’
엘지생건은 품질에 유독 신경 쓴다. 정부규제 이상의 자체 기준을 만들어두고 그걸 지키려 애쓴다. 화장품 원료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동물성 원료는 ‘후’에 들어가는 녹용 정도 말고는 거의 안 쓴다. 그 녹용도 시베리아산만 고집한다.
납의 국내기준이 100ppm인데 엘지생건은 그것의 5분의 1 정도 수준으로 관리한다. 한국,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등 나라마다 규제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아예 모든 항목에 대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로 관리하는 것이다.
화장품에는 기능품질이라는 게 있는데 주름개선 효과, 탄력효과 등이 그것이다. 화장품 부문에서는 이것을 5등급 처방으로 나눈다. 엘지생건에서는 원료와 제품에 대한 실험 데이터가 다 갖춰진 3등급 이상의 처방으로만 제품을 만들고, 럭셔리는 4~5등급 처방만을 고집한다. 자기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소비자에게 오픈해도 당당하기 위해서다. 그런 진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해물질이나 소비자의 안전성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도 철저히 검사한다. 예전에는 제품을 생산하는 루트에 안전성 문제가 없는지 1년에 한 번씩 검사했는데 이제는 원료가 들어올 때마다 검사한다. 처방은 똑같아도 원료를 공급하는 원료회사의 생산조건이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유해물질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는데, 만약 완제품 루트를 검사해서 문제가 생기면 제품 출시를 하지 않는다. 그래야 소비자의 안전을 충족시킬 수 있고, 수출할 때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대신 돈이 너무 많이 들기는 한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최근 지속가능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문화, 이런 연구, 이런 레거시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기업이 지속가능할 수 없어요.” 엘지생건 CTO의 말이다.
- 7장 ‘조직문화 개선과 정도경영 : 과하도록 바른 길로 간다’
“객관적으로 하시는 건 참 좋고 다른 데서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그레이프바인(grapevine, 비공식 의사전달 통로)이라는 게 있잖아요. 비공식 루트에서 들어온 정보가 더 정확할 때도 있고요. 솔직한 피드백이라든지 그런 건 어떻게 캐치하세요?”
간첩은 모두 이중간첩입니다. 어딜 가서 비밀을 알아올 수가 없어요, 주지 않으면. 그레이프바인으로 정보가 온다는 건 뭔가 나갔다는 뜻이거든요. 결국 그런 것 없이 해야 돼요. 그러려면 아무하고나 지위의 고하 없이 대화를 해야 하죠.
직원들을 만나는 시간이 오전 3시간, 오후에 3시간인데, 저는 사람을 길게 안 만나는 편이라 3~5분 얘기 나눕니다. 한 명만 오는 경우는 없고, 3~4명씩 오면 하루에 70~80명도 더 만날 겁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걸 다 질문하고, 그분들이 대답하고 싶은 것도 다 진솔하게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상당히 많은 걸 알게 되죠. 그리고 제게 이메일로 보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분이 ‘부회장님께 대통령에게 보내는 심정으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습니다’ 하고 보내오는 이메일들을 저는 100% 비밀보장하면서 확실히 처리해줍니다.
그런 진솔한 정보 루트를 갖고 싶어요.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나라면?>이라는 익명 제안코너를 온라인에 만들어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걸 올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많이 듣고 있고, 여전히 못 듣는 게 많겠지만, 그래도 꽤 듣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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